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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 20/30

빚과 종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골목의 흙은 질었다.

진소백은 허름한 처마 밑에 서서 한참 동안 그 질척한 빛깔을 내려다보았다. 밤새 누군가 물을 쏟은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밟고 다닌 눈발이 낮 동안 녹고, 다시 밤의 찬기운에 굳었다가, 새벽 문턱에서 조금씩 풀려난 자국이었다. 한 번 젖은 땅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사람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 노인의 방에서 들은 숨소리가 아직 귓가에 붙어 있었다. 끊어질 듯 말 듯 가늘게 이어지던 숨. 그 사이로 삐져나온 말.

하나가 많아.

진소백은 그 말을 다시 되뇌지 않으려 했다. 되뇌면 되뇌는 만큼 말은 더 날카로워졌고, 날카로워진 말은 누군가의 얼굴을 향했다. 그는 그 얼굴을 향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허봉의 얼굴. 늘 피곤에 젖어 있었지만 아이 앞에서는 웃으려고 애쓰던 얼굴. 허만복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던 손. 약값을 묻는 목소리 앞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던 사람.

그런데 발자국은 자꾸 그 집으로 갔다.

진소백은 약낭의 끈을 손가락으로 한 번 만졌다. 안에 든 약재는 많지 않았다. 빈칸이 더 많았다. 그는 오늘 새벽에도 자신이 가진 것보다 필요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요한 것은 약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살리는 말. 한 가족을 부수지 않는 침묵. 죽은 이를 저버리지 않는 증거. 그 모든 것이 약낭 하나보다 무거웠다.

허봉의 집은 골목 끝에서 두 번 꺾인 곳에 있었다. 낮은 담은 군데군데 흙이 떨어져 나갔고, 문짝의 아래쪽은 오래 젖은 나무처럼 검었다. 그 집 앞에 서면 늘 기침 소리가 먼저 들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짧고 얇은 기침.

아이의 것이었다.

진소백은 문을 두드리려다 손을 멈추었다. 안에서 여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허봉의 아내였다. 말을 알아들을 만큼 또렷하지는 않았으나, 달래는 소리와 걱정이 섞인 결은 문틈으로도 스며 나왔다. 조금 뒤 허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끓여. 진 의원이 준 것은 아껴야 하니까 반만 넣고.”

“반만 넣으면 듣겠어요?”

“오늘만 넘기면 된다.”

오늘만.

그 말이 너무 익숙해서 진소백은 눈을 감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오늘만 넘긴다고 했다. 오늘만 넘기고, 내일도 오늘이 되면 또 넘긴다. 그러다 어느 날 더는 넘길 수 없는 것이 문 앞에 선다. 빚쟁이일 수도 있고, 병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었다.

문 안쪽에서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허봉의 아내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들이 또 오면 어쩌려고요.”

잠시 아무 소리도 없었다.

진소백은 숨을 죽였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그 골목에 서 있었다. 발을 돌리려 해도, 돌아서면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았다.

허봉이 낮게 말했다.

“오지 않을 거야.”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말했어.”

“누가요?”

또 침묵.

진소백의 손이 약낭 끈을 더 세게 쥐었다. 끈이 손가락 마디를 파고들었다.

허봉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얼굴은 못 봤다.”

“얼굴도 못 본 사람 말을 믿어요?”

“믿은 게 아니야.”

이번에는 여인의 숨이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봉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진소백은 문짝의 나뭇결 사이로 방 안의 빛을 보았다. 흐린 등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빛은 사람 얼굴을 밝히기보다, 숨기기 좋을 만큼만 약했다.

“믿은 게 아니야. 붙잡은 거지.”

허봉의 말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곽서 쪽 빚이 얼마나 불었는지 당신도 알잖아. 처음엔 쌀 두 말 값이었어. 만복이 약값 빌리고, 의원값 빌리고, 또 이자 붙고…… 장부에 적힌 글자 하나가 쌀독보다 무겁더라. 갚으려고 일 나가면 아이가 더 앓고, 아이 곁에 있으면 돈이 더 불고.”

“그래도 그런 일은…….”

“그런 일이 뭔지 나도 몰랐다.”

진소백은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꺼지는 것을 느꼈다.

모른다.

그 말은 면죄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 사람다운 말이었다. 사람은 제 손으로 들어 올린 것이 돌인지 칼인지 모르고 붙잡을 때가 있었다. 춥고 배고픈 손은 더 그랬다. 붙잡은 다음에야 피가 묻어 있다는 것을 알기도 했다.

허봉이 말했다.

“처음엔 그냥 종이라고 했다. 남의 물건도 아니고,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고 했어. 가져다 놓으면 된다고. 아니, 가져오면 된다고 했던가…… 나도 정신이 없었다.”

여인이 흐느꼈다. 크게 울지도 못했다. 아이가 깰까 봐, 이웃이 들을까 봐, 빚쟁이가 냄새 맡을까 봐, 가난한 집의 울음은 늘 반쯤 삼켜져 있었다.

“당신은 왜 그걸 내게 말 안 했어요.”

“말하면 당신 눈을 못 볼 것 같아서.”

허봉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만복이 눈도.”

진소백은 자신도 모르게 문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발밑의 흙이 질척하게 눌렸다. 그는 그 소리가 안까지 들릴까 봐 몸을 굳혔다. 안에서는 아이가 다시 기침했다. 허봉의 말이 끊기고, 급히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물그릇, 천, 낮은 달램.

“아버지…….”

허만복의 목소리는 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희미했다.

“여기 있다. 아버지 여기 있어.”

허봉의 그 말에 진소백은 속이 아팠다.

밤에 움직인 손이 바로 그 손이었다. 아이의 등 뒤를 쓸어내리는 손. 식은 땀을 닦아 주는 손. 약값을 위해 고개를 숙였던 손. 그리고 어쩌면, 하 노인의 방 근처 어둠 속에서 떨렸을 손.

진소백은 그 손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떠올리지 않으려 할수록 더 또렷해졌다. 손가락 마디의 갈라진 살. 장작을 패다 굳은 굳은살. 아이의 맥을 짚을 때 부끄러울 만큼 조심스럽던 움직임. 그 손이 같은 손이라는 사실은, 사람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려던 그의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악한 손이면 쉬웠을 것이다.

칼을 든 자, 웃으며 해치는 자, 남의 눈물을 세며 이득을 얻는 자라면 쉬웠을 것이다. 미워하면 되었고, 막으면 되었고, 드러내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봉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약값을 못 내어 머리를 숙였고, 아내 앞에서 작아졌고,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함께 숨을 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둠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진소백은 문 앞을 떠났다. 들어가서 묻는다면 말은 더 나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허봉은 도망갈지도 몰랐다. 무릎을 꿇을지도 몰랐다. 아이가 깰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소백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새벽빛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 담벼락 위의 서리는 회색으로 빛났고, 굴뚝에서는 묽은 연기가 올라왔다. 어느 집은 밥을 짓고, 어느 집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사람 사는 마을은 죽음이 들어와도 아침을 준비했다. 그것이 잔인한지 다행인지 진소백은 알 수 없었다.

허봉의 집에서 세 번째 담장을 지나자, 진소백은 발을 멈추었다.

담장 아래 흙이 조금 파여 있었다. 어제 보지 못한 자국이었다. 눈에 띌 만큼 깊지는 않았다. 누군가 오래 서 있었던 자리. 발끝으로 흙을 밀고, 다시 밟아 눌러 지운 자리. 담 너머로 허봉의 집 뒤쪽 창이 보일 만한 위치였다.

진소백은 몸을 낮추었다. 손끝으로 흙을 만졌다. 차갑고 눅눅했다. 흙 사이에 잘게 부서진 종이 조각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았다. 바라보기만 했다. 종이인지, 낙엽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작았다. 그러나 섬유가 얇게 일어난 모양은 분명 낙엽과 달랐다.

종이.

허봉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냥 종이라고 했다. 가져오면 된다고 했다.

진소백은 그 조각을 집어 약낭의 빈 칸에 넣었다. 약재와 종이 조각이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했다. 하나는 병을 덜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병보다 더 깊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둘은 같은 무게로 그의 허리께에 매달렸다.

그는 다시 걸었다.

곽서의 이름은 이미 골목마다 다른 표정으로 떠돌고 있었다. 누구는 그를 장부 잘 쓰는 상인이라 했고, 누구는 손에 피 안 묻히는 사람이라 했다. 진소백은 그 말들을 믿지도, 버리지도 못했다. 다만 허봉의 말 속에서 곽서의 빚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사람의 목에 걸린 줄이었다. 그 줄을 당긴 손이 곽서의 것인지, 곽서 위의 누군가의 것인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줄은 있었다.

허봉은 그 줄 끝에 매달려 있었다.

진소백은 시장으로 들어섰다. 이른 시각인데도 국밥집은 솥을 올리고 있었고, 약재상 앞에는 문턱을 쓸어내는 아이가 있었다. 장부를 든 사내 둘이 맞은편 골목으로 지나갔다. 그들의 옷자락에는 눈에 띄는 표식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자연스레 길을 비켜 주었다. 진소백도 비켰다. 몸이 아니라 시선만.

사내 하나가 말했다.

“허씨 집은 며칠 더 두랍니다.”

다른 하나가 웃었다.

“왜? 이자 더 붙이게?”

“위에서 말이 내려왔대.”

“위?”

“묻지 말라던데.”

그들은 더 낮게 웃고 지나갔다. 진소백은 그 웃음의 끝을 따라가지 않았다. 따라가면 무엇인가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가 잡아야 할 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웃음 뒤에 남겨진 사람의 숨이었다.

위에서.

그 말은 허봉의 담장 밖 목소리와 맞물렸다. 얼굴을 못 본 자. 빚을 없애 준다는 말. 물건을 가져오라는 사주. 곽서의 장부. 장부 위에 다시 누군가의 손.

진소백은 속이 서늘해졌다. 거대한 음모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작게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앓았다. 약값이 필요했다. 빚을 냈다. 이자가 붙었다. 장부가 불었다. 누군가 그 장부를 미끼처럼 흔들었다. 종이를 가져오라 했다. 한 평범한 사내가 그 말에 손을 뻗었다.

사람의 이익은 그렇게 가까운 데 있었다. 황금으로 번쩍이지도 않았고, 거창한 깃발을 들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의 뜨거운 이마 옆에 놓인 빈 약그릇처럼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움직였고, 움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 가까이에 섰다.

진소백은 국밥집 앞을 지나치다 멈추었다. 허봉이 예전에 여기서 만복이를 안고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먹지 못하고 숟가락만 쥐고 있었고, 허봉은 국물을 식혀 아이 입가에 대 주었다. 그때 허봉은 진소백을 보고 민망하게 웃었다.

“먹여야 낫지요. 약만 먹어서 사람이 삽니까.”

그 말에 진소백은 웃지도 못하고 약낭을 만졌었다. 그날 허봉은 국밥값을 반만 냈고, 주인은 모른 척했다. 세상에는 그런 모른 척도 있었다. 살리는 모른 척. 그런데 또 다른 모른 척도 있었다. 누군가 빚에 몰려 담장 밖에서 목소리를 듣는 동안, 세상은 아무것도 못 본 척했다.

그는 하 노인의 집 쪽으로 발을 돌렸다.

하 노인의 집은 어제보다 더 조용했다. 병든 사람의 집이 조용한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진소백은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가 들어갔다. 방 안에는 탁한 약 냄새와 오래된 이불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 노인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고, 가슴은 아주 느리게 오르내렸다.

진소백은 곁에 앉아 맥을 짚었다. 손끝에 닿는 맥은 가늘고 깊었다. 마치 물 밑의 실처럼 잡힐 듯 놓쳤다. 그는 약낭에서 약재를 꺼내려다, 종이 조각이 들어 있는 칸을 보았다. 손이 멈췄다.

살리는 것과 밝히는 것이 같은 손 안에 있었다.

하 노인이 죽음 끝에서 남긴 말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하나가 많아.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는 몰랐다. 다만 그 말이 허봉에게 가까워질수록, 진소백은 더 무거워졌다. 노인의 숨과 아이의 숨이 서로 다른 방에서 같은 줄에 묶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쪽을 당겨도 다른 쪽이 흔들릴 것 같았다.

하 노인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진소백은 몸을 숙였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마른 숨만 새었다. 그는 물을 적신 천으로 노인의 입술을 축였다. 노인의 피부는 종이처럼 얇았고,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희미했다. 진소백은 그 손을 보다가 허봉의 손을 떠올렸다. 늙은 손과 가난한 손. 다르게 살아왔으나 둘 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 가장자리를 누군가 이용했다.

진소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 그는 한 번 뒤돌아보았다. 하 노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말이 없는 사람이 가장 무거운 물음을 남기기도 했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완전히 떠 있었다. 볕은 차가웠다. 골목의 질척한 흙 위로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로 찍혔다. 진소백은 허봉의 집으로 다시 향했다. 이번에는 문 앞까지 가지 않고, 맞은편 담 그늘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허봉이 나왔다. 밤을 샌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 밑이 꺼졌고, 수염은 거칠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살필 힘도 없어 보였다. 품 안에 무언가를 넣고 있었다. 진소백은 그것이 돈인지, 장부 조각인지, 약인지 알 수 없었다. 허봉은 문을 닫기 전에 안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짧은 시선만으로도 그 안에 아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소백은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허봉은 골목을 지나 시장 쪽으로 걸었다.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도망치는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갚으러 가는 사람의 걸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 하던 일을 하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평범함이 진소백을 더 아프게 했다. 죄는 때로 사람의 등허리에 특별한 표식을 남기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옷, 같은 걸음, 같은 고단함 속에 숨어 있었다.

진소백은 뒤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허봉이 사라진 골목 끝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알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으나 알게 되었다.

허봉은 빚에 몰렸다. 곽서의 장부가 그를 잡았다. 아이의 열이 그를 밀었다. 담장 밖 얼굴 없는 목소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종이를 가져오면 빚을 없애 주겠다고 했다. 허봉은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살려고, 아이를 살리려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손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종이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 노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소백은 그 모든 알 수 없음보다 더 선명한 것을 보았다.

진실이 한 가족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이마 곁에, 식은 약그릇 옆에, 여인이 접어 둔 낡은 옷 사이에, 허봉이 문을 닫고 나간 빈자리 위에. 그것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지만, 곧 이름을 요구할 것이다. 죄라고 부를 것인지, 사정이라고 부를 것인지, 둘 다라고 부를 것인지.

진소백은 약낭을 쥐었다. 안에는 약재와 작은 종이 조각이 함께 있었다. 하나는 허만복의 열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허봉의 집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처음으로, 밝히는 일과 덮는 일 사이에 섰다.

하 노인의 숨이 떠올랐다. 허만복의 기침이 이어졌다. 허봉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 사이를 지나갔다.

믿은 게 아니야. 붙잡은 거지.

진소백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골목은 밝아졌고, 사람들은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도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진실 앞에 선 사람의 발밑이 얼마나 질척이는지도.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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