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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 23/30

남은 종이

비가 그친 뒤의 수향은 더 조용했다.

관아 쪽에서 울리던 발소리와 고함도 밤이 깊자 멀어졌다. 허봉을 데려간 포졸들의 횃불은 이미 강가 굽이 너머로 사라졌고, 객잔 앞 진흙길에는 발자국만 남아 물을 머금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을 닫았다. 닫힌 문 안에서 낮은 말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누구도 크게 울지 않았다.

진소백은 객잔 뒤편 작은 방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끓인 약 냄새가 났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등불빛이 젖은 마룻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는 한동안 손을 올리지 못했다. 안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가늘고 짧았다. 기침 뒤에는 숨을 고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들어오시오.”

여자의 목소리였다.

진소백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하 노인은 낮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이불은 가슴까지 덮였고, 목덜미에는 젖은 수건이 얹혀 있었다. 얼굴빛은 등불 아래에서도 종이처럼 떠 있었다.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으나 완전히 잠든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여자는 침상 곁에 앉아 약 사발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녀의 소매 끝에는 약물이 조금 묻어 있었다. 진소백이 들어서자 그녀는 고개만 돌렸다.

“잠깐 깼소.”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오래는 어렵소.”

그 말에 하 노인의 눈꺼풀이 떨렸다. 마른 입술이 몇 번 붙었다 떨어졌다.

진소백은 침상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이 오래된 널이라 발을 옮길 때마다 아주 낮게 삐걱거렸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하 어르신.”

하 노인의 눈이 그를 찾았다. 초점이 맞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노인은 진소백의 얼굴을 보다가, 그 뒤의 빈벽을 보다가, 다시 진소백에게 돌아왔다.

“끝났나.”

목소리는 숨에 섞여 나왔다.

“허봉은 관아로 갔습니다.”

“죽였나.”

“아닙니다.”

하 노인의 목 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소리가 짧게 새었다.

“그래야지.”

그는 손을 움직이려 했다. 이불 위로 나온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었다. 진소백이 손을 받쳤다. 손등의 살은 너무 가벼웠다.

“그놈이…… 찾던 것.”

진소백은 숨을 멈추지 않으려 애썼다.

“종이 말입니까.”

하 노인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턱만 조금 내려갔다.

여자가 사발을 다시 들어 입가에 대려 했지만, 하 노인은 고개를 틀었다. 약물 한 방울이 입가를 타고 내려 수염에 걸렸다.

“마시고 말하십시오.”

진소백이 낮게 말했다.

“마시면…… 말이 흐려져.”

하 노인은 힘겹게 입술을 적셨다. 여자는 더 권하지 않았다.

“강에서 건졌다고 하셨습니다.”

“젊을 때였지.”

하 노인의 시선이 천장으로 올라갔다. 천장은 낮았다. 그을음이 낀 들보 사이로 오래된 거미줄이 붙어 있었다.

“큰비 뒤였다. 윗마을 창고가 떠내려가고, 죽은 소도 떠내려오고…… 별게 다 떠내려오던 날이었어. 나는 그때 나룻배를 묶고 있었다.”

그는 더 말하려다 숨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얕게 오르내렸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들어야 한다.”

노인의 손가락이 진소백의 손바닥을 눌렀다. 힘은 없었으나 뜻은 분명했다.

“물에 젖은 나무통이 하나 걸렸다. 깨진 통이었다. 안에는 썩은 천과…… 종이 몇 장이 붙어 있었어. 대부분은 손대자마자 풀어졌다. 하나만, 한 조각만 살아남았다.”

“왜 숨기셨습니까.”

하 노인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무서웠으니까.”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등잔 심지가 작게 튀었다.

“글을 아는 놈에게 보였다가…… 그놈이 다음 날 사라졌다. 그 뒤로 묻는 사람들이 왔다. 서로 모르는 얼굴들이었는데, 묻는 말은 같았다. 물에서 건진 것이 있느냐고.”

진소백은 노인의 손을 놓지 않았다.

“허봉도 그 때문에 왔습니까.”

“처음엔 몰랐다. 늙으면…… 모른 척하는 것과 정말 모르는 것이 섞인다.”

노인이 기침했다. 여자가 손수건을 대었다. 손수건에는 피가 아주 조금 묻었다. 여자는 그것을 접어 보이지 않게 쥐었다.

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오두막에는 없다.”

진소백의 눈이 조금 좁아졌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사당.”

“수향 사당 말입니까.”

“강신 모시는 낡은 사당. 사람들이 안 가는 쪽…… 뒤 벽.”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무언가를 세는 듯했다.

“뒤뜰에 버드나무가 있다. 죽은 가지가 한쪽으로 꺾인 나무. 그 아래 장독 셋. 가운데 독은 비어 있다. 독 안쪽 바닥을 들면…… 돌이 있다. 얇은 돌. 그 밑.”

진소백은 머릿속에 그대로 새겼다.

“가운데 장독. 안쪽 바닥. 얇은 돌.”

“기름종이에 싸고, 다시 납을 발랐다. 그래도…… 오래됐으니 모른다.”

노인의 입꼬리가 떨렸다. 웃으려 한 것 같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했다.

“왜 지금 말씀하십니까.”

하 노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목 안에서 거칠게 걸렸다.

“죽은 애들이…… 너무 많았다.”

진소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숨겨서 산 사람도 있을 게다. 내가 숨겨서 죽은 사람도 있을 게다. 어느 쪽이 많은지 모르겠어.”

“그 종이가 사람을 죽였습니까.”

노인은 진소백을 보았다. 흐린 눈이 잠깐 또렷해졌다.

“종이는 사람을 못 죽인다.”

그 말 뒤에는 긴 침묵이 붙었다.

진소백은 더 묻고 싶었다. 누가 찾았는지, 글을 아는 자가 누구였는지, 허봉에게 시킨 자가 누구인지. 그러나 하 노인의 호흡은 이미 물러나는 사람의 것이었다. 질문이 많을수록 대답은 줄어들 것이다.

그는 한 가지만 물었다.

“그 종이를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

하 노인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불렀다.”

여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지금 가겠소?”

진소백은 하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노인은 다시 잠길 듯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아직 진소백의 손바닥을 붙잡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 노인은 그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의 힘이 빠졌다.

진소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문 쪽으로 따라 나왔다.

“혼자 가겠소?”

“사당 위치를 압니까.”

“압니다.”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등불 하나를 집었다. 진소백은 거절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젖어 있었다. 객잔 뒤 골목을 지나 강 쪽으로 내려가니 물소리가 들렸다. 큰비가 지나간 강은 아직 불어난 채였다. 흙탕물이 말없이 밀려가고, 물가에 박힌 말뚝들이 검게 젖어 있었다.

낡은 사당은 마을 끝에 있었다. 예전에는 누군가 오갔을 길이었으나 지금은 풀잎이 발목을 잡았다. 지붕 기와는 여러 장 빠져 있었고, 처마 밑에는 새 둥지의 마른 풀만 남아 있었다. 문은 비스듬히 닫혀 있었다.

여자가 등불을 들어 뒤뜰을 비췄다.

버드나무가 있었다. 한쪽 가지가 오래전에 부러진 채 말라 있었다. 그 아래 장독 셋이 어둠 속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진소백은 가운데 독 앞에 웅크렸다. 독 안은 비어 있었다. 손을 넣자 바닥처럼 보이던 둥근 판이 손끝에 걸렸다. 그는 그것을 들어냈다. 아래에는 흙먼지가 조금 있었고, 그 가운데 얇은 돌이 놓여 있었다.

돌을 들어 올릴 때 손가락에 찬 습기가 묻었다.

그 밑에 납으로 봉한 작은 꾸러미가 있었다.

진소백은 그것을 꺼냈다. 주먹보다 조금 작았다. 겉을 싼 기름종이는 검게 변했고, 납은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안쪽은 아직 닫혀 있었다.

여자가 등불을 낮췄다.

“맞소?”

“아마도.”

진소백은 납이 갈라진 부분을 손끝으로 조금 벌렸다. 벌어진 틈으로 오래된 냄새가 새어 나왔다. 그는 안쪽의 천을 조심스레 풀었다. 물에 삭은 종이 한 조각이 드러났다.

종이는 손가락 두 마디 너비보다 조금 컸다. 가장자리는 검게 문드러졌고, 글자의 절반은 먹이 번져 알아보기 어려웠다. 남은 획들도 이어지지 않았다. 오래된 지명처럼 보이는 글자가 둘 있었다. 하나는 강 이름 같았고, 하나는 고을 이름 같았다. 그러나 서로 붙어 있는지, 따로 적힌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진소백은 더 들여다보지 않았다. 바람만 불어도 부서질 것 같았다.

“읽을 수 있소?”

여자가 물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허봉은 이걸 찾으려고 사람을 죽였소?”

“허봉이 찾은 것은 이것일 겁니다.”

“이것 때문에?”

진소백은 종이를 다시 천에 싸며 말했다.

“이 조각 때문인지, 이 조각이 가리키는 것 때문인지는 모릅니다.”

여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등불이 흔들리자 사당 뒤 벽의 그림자가 길게 움직였다.

돌을 제자리에 놓고 독 안쪽 바닥을 덮은 뒤, 진소백은 꾸러미를 품 안에 넣었다. 그때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쪽이었다. 둘은 말없이 사당을 나왔다.

객잔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노인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요.”

“압니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요.”

“많습니다.”

“다 물을 수는 없을 거요.”

진소백은 강물을 보았다. 어둠 속의 강은 흐르는 모양보다 소리로만 있었다.

“그렇다고 들을 수 있는 것까지 놓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자는 그를 보지 않고 걸었다.

객잔에 돌아왔을 때 방 앞에는 주모가 서 있었다. 주모는 두 사람을 보자 비켜섰다. 눈가가 붉었지만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방금 전부터 자꾸 찾습니다.”

진소백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 노인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보다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입술이 벌어져 있었고, 숨은 들이쉴 때마다 목 안에서 걸렸다.

진소백이 곁에 앉았다.

“가져왔습니다.”

노인의 눈이 움직였다.

진소백은 품에서 꾸러미를 꺼내 보였다. 펼치지는 않았다. 하 노인은 그것을 확인하듯 오래 바라보다가,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래.”

그 한마디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누가 이것을 찾습니까.”

진소백이 물었다.

노인의 눈꺼풀이 떨렸다.

“모른다.”

“정말 모릅니까.”

“얼굴은…… 모른다.”

“이름은 들은 적 있습니까.”

하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숨이 길게 새었다. 진소백은 다시 묻지 않았다. 노인의 손이 이불 위에서 움직였다. 이번에는 진소백이 잡기 전에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무덤.”

진소백의 등이 굳었다.

“무덤 말입니까.”

“네가…… 파낸 것.”

여자가 방 안 한쪽에 멈춰 섰다. 주모는 문 밖에 있었다. 방 안의 등불이 너무 밝은 듯 진소백은 심지를 조금 낮췄다.

“거기 있던 명단을 말하시는 겁니까.”

하 노인의 입이 마른 소리를 냈다.

“스물…… 셋.”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름들…… 네가 갖고 있지.”

“그렇습니다.”

노인은 눈을 뜨려 했다. 한쪽 눈만 조금 열렸다. 그 눈은 진소백이 아니라, 그의 가슴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접힌 종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진소백은 품 안 다른 쪽에서 접어 둔 명단을 꺼냈다. 무덤에서 얻은 그 종이는 여러 번 접고 펴서 자국이 깊었다. 그는 펼치지 않은 채 손에 쥐었다.

“이것도 보셨습니까.”

하 노인은 숨을 들이켰다. 소리가 칼끝처럼 얇았다.

“오래전에…… 비슷한 걸.”

“누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기억이……”

노인의 얼굴에 주름이 더 깊게 잡혔다. 그는 무언가를 잡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진소백은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명단……”

노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하나가…… 많아.”

진소백의 손가락이 종이를 눌렀다.

“무엇이 많다는 겁니까. 이름이 많다는 말입니까.”

하 노인은 입을 열었다. 숨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멈췄다.

“원래는……”

그 뒤는 오지 않았다.

진소백은 몸을 더 숙였다.

“하 어르신.”

노인의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눈동자가 진소백을 스치고, 방 안의 들보를 스치고, 문 쪽의 어둠을 스쳤다. 두려움인지 회한인지 가를 수 없는 것이 그 눈 안에 잠깐 머물렀다.

그리고 사라졌다.

숨이 빠져나간 뒤에도 방은 그대로였다. 등불은 타고 있었고, 약 사발은 식어 있었다. 밖에서는 누군가 발을 옮기다 멈췄다. 주모가 문틀을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하 노인의 손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잠시 뒤 손을 거두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소백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노인의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 주었다. 손가락이 굽은 채 잘 펴지지 않았다. 억지로 펴지 않고 그대로 덮었다. 주모가 문 밖에서 낮게 흐느꼈다. 방 안의 누구도 그 소리를 막지 않았다.

한참 뒤 진소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물었다.

“어디 가시오.”

“강가에 있겠습니다.”

“지금?”

“방 안에 있으면 더 물을 것 같습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소백은 명단과 작은 꾸러미를 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객잔 마루에는 젖은 신발 자국들이 굳어 가고 있었다. 누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겹쳐 있었다.

강가에는 안개가 낮게 깔렸다. 그는 나루터의 젖은 말뚝 옆에 앉았다. 물이 불어나 계단 두 칸을 삼키고 있었다. 검은 물 위로 등불 몇 개가 흔들렸다. 맞은편 집들에서 새어 나온 빛이었다.

진소백은 먼저 명단을 펼쳤다.

스물셋.

이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먹빛은 희미해졌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한 줄씩 눈으로 짚었다. 너무 익숙해져 이제는 순서까지 외울 듯했다. 그러나 하 노인의 말은 그 위에 얹히지 않았다.

하나가 많아.

원래는……

그는 마지막 말을 여러 번 떠올렸다. 원래는 무엇이었는가. 원래는 적었는가.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는가. 원래는 명단이 아니었는가.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다음 칸이 비었다.

그는 꾸러미도 꺼냈다. 기름종이를 조금 열고 안쪽의 오래된 조각을 보았다. 글자는 여전히 알아보기 어려웠다. 물에 삭은 섬유가 등불빛을 받아 가늘게 일어났다. 오래된 지명처럼 보이는 두 글자 사이에는 끊어진 획들이 있었다. 이어 보면 말이 될 듯하다가도,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다시 흩어졌다.

이것을 찾던 자가 있다.

허봉은 찾았다. 하 노인은 숨겼다.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물었다.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죽었다. 그런데 종이 자체는 침묵했다. 진소백이 손끝으로 가장자리를 누르자, 종이는 마른 잎처럼 떨렸다.

“너무 오래 펼쳐 두면 상하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진소백은 돌아보지 않았다.

“장례 준비는요.”

“주모가 사람을 불렀소. 날 밝으면 마을 사람들이 올 거요.”

여자는 그의 옆으로 와 섰다. 강물을 내려다보는 척했으나, 시선이 명단 쪽으로 한 번 내려온 것을 진소백은 보았다.

그는 명단을 접지 않았다.

“하 노인이 마지막으로 이걸 말했습니다.”

“들었소.”

“하나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랬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자는 대답하기 전에 강 건너를 보았다. 안개 때문에 맞은편 불빛이 흐렸다.

“노인이 죽기 전 한 말은 붙잡기 어렵소.”

“그렇다고 버릴 말도 아닙니다.”

“버리라는 뜻은 아니오.”

진소백은 명단을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조금 돌렸다. 등불 하나가 멀리서 흔들려 이름들 위로 빛이 지나갔다.

“이 중 누가 많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의 시선이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아주 짧았다.

정말 짧아서, 보지 않으려 했다면 지나쳤을 것이다. 그녀의 턱이 굳었다. 눈썹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숨을 크게 들이쉰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얼굴에서 말이 빠져나갈 길이 한 번 닫힌 듯했다.

진소백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여자는 곧 고개를 들었다.

“젖겠습니다. 접어 두시오.”

진소백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는 이름이 있습니까.”

“수향에는 이름이 많소.”

“나는 이 명단을 물었습니다.”

“나도 그 말을 들었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진소백은 종이를 천천히 접었다. 접힌 선들이 맞물리며 이름들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하 노인은 원래는, 하고 말을 끊었습니다.”

“죽는 사람은 말을 끝까지 못 하기도 하오.”

“당신은 방금 이 명단을 보고 멈췄습니다.”

여자는 그를 보았다. 등불이 없어서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강가의 습한 어둠 속에서 얼굴의 윤곽만 남았다.

“사람이 죽은 밤이오.”

“그 말은 대답이 아닙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으면 되오.”

진소백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내어 주지도 않았다.

강물이 계단을 때렸다. 물살에 떠내려온 작은 가지 하나가 말뚝에 걸렸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당신은 내게 많은 것을 숨깁니다.”

진소백이 말했다.

“그대도 나에게 다 말하지 않소.”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못 합니다.”

“나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소.”

“모르기 때문입니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진소백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밀어붙이면 그녀는 물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 그녀가 어디까지 물러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명단을 품 안에 넣고, 오래된 조각도 다시 싸서 따로 넣었다. 두 종이는 서로 닿지 않게 했다.

“하 노인은 두려워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진소백은 강을 보았다.

“마지막까지.”

“그가 숨긴 게 종이뿐이었을까요.”

“모릅니다.”

“모른다는 말이 늘어나고 있소.”

진소백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남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종이 하나. 끝나지 않은 말 하나. 그리고 방금 당신의 얼굴.”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객잔 쪽에서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 노인의 몸을 수습하려는 모양이었다. 주모의 울음은 이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나무문 여닫는 소리, 물동이를 놓는 소리, 누군가 낮게 염불을 외는 소리가 밤공기에 흩어졌다.

진소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물었다.

“돌아가겠소?”

“예.”

“명단은 보여 주지 않는 게 좋겠소.”

“누구에게 말입니까.”

“아무에게나.”

그녀는 그렇게만 말했다.

진소백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굳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보았다. 그 짧은 닫힘. 이름들 위를 지나던 눈. 말하지 않기로 정한 사람의 입.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충고는 듣겠습니다.”

둘은 객잔으로 걸어갔다. 강은 등 뒤에서 계속 흘렀다. 밤새도록 흘러도, 물속에서 올라온 조각은 이제 진소백의 품 안에 있었다. 하 노인의 마지막 말도 함께 있었다.

하나가 많아.

원래는……

그 뒤의 빈자리는 어떤 이름보다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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