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새벽의 객잔은 밤새 뒤집어쓴 습기를 털어 내지 못했다. 마룻장 틈마다 젖은 먼지가 눌어붙어 있었고, 부엌 쪽에서는 식은 장국 냄새와 타다 만 장작 냄새가 함께 흘렀다. 진소백은 계단을 내려오며 손잡이 아래에 닿는 먼지의 두께를 손끝으로 느꼈다. 누군가 밤중에 오르내렸다면 자국이 남았을 터였다.
한 줄, 희미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시선도 내리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계단을 밟을 때 발뒤꿈치를 조금 늦게 떼었다. 먼지 위의 자국은 객실 쪽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빠져 있었다. 발 크기는 작지 않았고, 보폭은 일정했다. 술 취한 손님도, 객잔 일꾼도 아니었다.
그 여자는 이미 아래층 구석에 앉아 있었다.
찻잔 하나를 앞에 두고 있었으나 입을 대지는 않았다. 어제와 같은 차림이었다. 먼 길을 가는 사람처럼 간단했고, 오래 머물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작은 보퉁이가 놓여 있었다. 진소백의 시선을 받자 여자는 잔을 들어 올렸다.
“떠나는군요.”
“먼저 내려와 기다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기다린 건 아니에요. 여기 앉아 있으면 문이 두 개 다 보이거든요.”
진소백은 그녀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기둥 옆 빈자리에 몸을 틀어 앉았다. 앞문과 뒷문이 동시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객잔 주인은 아직 눈을 비비며 장부를 넘기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뱃사람 둘이 눅눅한 만두를 찢어 먹고 있었다. 말소리는 낮았으나 귀를 기울이면 들릴 만큼 가까웠다.
“강물이 어젯밤보다 불었다지.”
“나루가 늦게 열린다던데.”
“늦어도 오늘은 떠나야 해. 수향에 오래 있으면 벌레가 붙어.”
둘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진소백은 웃음 끝을 들으며 봇짐 끈에 손을 얹었다. 그 안에 싸맨 부러진 칼날의 무게가, 묵직하지도 가볍지도 않게 걸음을 붙잡는 듯했다.
여자가 그 손길을 보았다.
“그건 여전히 데리고 가는군요.”
“버릴 물건이면 어제 버렸겠지.”
“버리기 아까운 물건이라기보다, 버리면 안 되는 물건처럼 다루네요.”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객잔 주인이 다가와 묽은 죽 한 그릇과 장아찌를 내려놓았다. 그는 동전 두 닢을 밀었다. 주인이 한 닢을 집어 들다 말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나루 가십니까?”
“열렸나.”
“안개 걷히면요. 동쪽 배는 먼저 찬답니다. 북쪽 길은 비 때문에 수레가 처져서 사람들이 배로 몰려요.”
“서쪽은?”
“서쪽은 길이 질척하긴 해도 갑니다. 다만 길목마다 묻는 놈들이 많다더군요. 장사꾼인지 포졸인지 모를 놈들.”
주인은 말을 끝내고도 한 번 더 진소백의 허리춤을 보았다. 진소백은 죽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쌀알이 덜 퍼져 있었다. 혀에 닿는 거친 껍질이 오히려 잠을 밀어냈다.
“서쪽으로 가요?”
여자가 물었다.
“그쪽에 볼 일이 있다.”
“이름을 찾는 일?”
숟가락이 그릇 안쪽을 긁었다. 소리는 작았지만, 옆자리의 뱃사람 하나가 고개를 돌릴 만큼 날카로웠다. 진소백은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뜨겁지 않은 찻잔이었다.
“말을 고르는 게 좋을 텐데.”
“이미 고른 말이에요. 당신이 어제 밤에 종이를 세 번 접는 걸 봤어요. 이름이 적힌 종이는 접는 모양이 달라요. 돈문서나 약방문은 그렇게 접지 않죠.”
“보았다는 말이 자랑처럼 들리는군.”
“자랑은 아니고, 이유예요. 내가 같은 배를 타도 되는 이유.”
진소백은 죽을 밀어 놓았다. 아직 반이 남아 있었다.
“같은 배를 탄다고 누가 정했지?”
“아직은 아무도요.”
여자는 그제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술을 적신 정도였다. 그녀의 눈은 객잔 문가에 걸린 젖은 발을 지나, 밖의 흐린 하늘 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나는 오래된 흔적을 좇고 있어요.”
진소백은 기다렸다. 여자는 말을 더하지 않았다.
“흔적이라.”
“사람이 남긴 것도 있고, 사람이 지운 것도 있어요. 그 둘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가 있죠.”
“수수께끼를 팔 셈이면 값부터 말해.”
“값은 아직 몰라요. 다만 그 흔적을 아는 정보상이 하나 있어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름이 여러 길목에서 비슷하게 들렸어요. 수향에서 서쪽으로 나가야 잡힐 가능성이 높고요.”
“그게 내 일과 무슨 상관이지?”
“당신이 찾는 이름들도 그쪽으로 흘러갔잖아요.”
진소백은 잠시 그녀의 손을 보았다. 찻잔을 쥔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있었고, 새로 베인 자국은 없었다. 어제 부러진 검을 볼 때 그녀가 눈꺼풀을 한 번 늦게 감았던 것이 떠올랐다. 아는 눈이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달랐다.
“내가 찾는 게 이름이라고 누가 말했나.”
“당신이요.”
“내 입으로?”
“아니요. 사람을 찾는 이는 얼굴을 묻고, 물건을 찾는 이는 모양을 묻죠. 당신은 간판과 장부와 뱃사람들의 말끝을 봤어요. 이름이 바뀌었는지, 같은 이름이 둘인지, 없는 이름이 갑자기 생겼는지를 보는 사람처럼.”
진소백은 웃지 않았다. 부정도 하지 않았다.
객잔 문이 열리며 물기 섞인 바람이 들어왔다. 짧은 회색 겉옷을 입은 사내가 문턱에 서서 안을 훑었다. 눈이 한 번 지나갔다. 진소백에게 닿았고, 여자의 찻잔에 닿았고, 다시 장부를 든 주인에게 갔다. 사내는 만두 두 개를 사 들고 곧 나갔다.
그가 나간 뒤에도 문은 조금 늦게 닫혔다. 진소백은 문틈으로 사내의 뒤꿈치가 어느 쪽으로 꺾이는지 보았다. 나루터 쪽이었다.
“어젯밤에도 있었던 발걸음과 비슷하군요.”
여자가 말했다.
“너도 들었나.”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두 번은 지나치게 조심했고, 한 번은 일부러 소리를 냈거든요.”
“일부러?”
“안에 있는 사람이 겁을 먹는지 보려고.”
진소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이 장부 너머로 눈치를 살폈다. 진소백은 보퉁이를 들었다. 여자의 보퉁이는 이미 매듭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서쪽 나루는 배가 늦다.”
“그래서 걸어가요?”
“나루터를 보고 정한다.”
여자도 일어났다. 둘은 같이 나섰지만 나란히 걷지는 않았다. 객잔 앞 진흙길에는 지난밤 빗물이 고여 있었다. 수향의 집들은 낮은 처마 아래에 아직 잠이 남아 있었고, 물길을 따라 걸린 등은 꺼진 뒤에도 기름 냄새를 풍겼다. 저 멀리 나루 쪽에서는 삿대가 배 옆구리를 치는 둔한 소리가 들렸다.
진소백은 앞서 걷다가 한 번 멈추었다.
“이름.”
여자도 멈추었다. 그녀는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젖은 골목 끝을 보았다. 그곳에는 생선 상자가 쌓여 있었고, 상자 밑으로 물이 흘렀다.
“누구 이름요?”
“네 이름.”
“이제 와서요?”
“같은 배를 타자는 사람이 이름도 없으면 곤란하지.”
“그동안은 곤란하지 않았잖아요.”
“그동안은 같은 배를 타지 않았으니까.”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바람에 귀 옆의 잔머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그녀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웃음이 되기 전의 선인지, 말을 삼킨 뒤의 선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름을 들으면 믿을 수 있어요?”
“아니.”
“그런데 왜 묻죠?”
“부를 말이 필요하오. ‘그 여자’라고만 생각하다간, 급할 때 부르지도 못하겠소.”
그녀는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소리가 없었다. 잠깐 뜸이 있었다. 진소백은 그 틈이 길어지는 동안 그녀가 거짓 이름을 고르는지, 진짜 이름을 버릴지 가늠했다. 어느 쪽이든 확인할 길은 없었다.
“유란.”
그녀가 말했다.
그뿐이었다.
성도 붙지 않았다. 어느 고을의 누구인지도, 어떤 글자를 쓰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을 마친 사람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진소백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붙었다.
“유란.”
그가 한 번 불렀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네.”
대답은 왔다.
나루터는 이미 사람으로 찼다. 젖은 짚신들이 진흙을 짓이겨 검은 떡처럼 만들어 놓았고, 짐꾼들이 새끼줄을 어깨에 걸고 소리쳤다. 말린 생선 더미와 젖은 베옷, 짐승 가죽과 술독 냄새가 뒤섞였다. 배들은 물결에 배를 부딪치며 삐걱거렸고, 뱃사공들은 서로 자기 배가 먼저 뜬다고 우겼다.
“서쪽! 서쪽 강어귀 지나 큰길까지! 짐 있는 놈은 돈 더 내!”
“북쪽 물길은 늦는다! 안개 걷히면 한꺼번에 밀린다!”
“칼 찬 손님은 앞돈! 배 위에서 싸움 나면 물에 던진다!”
진소백은 군중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유란은 반 걸음 뒤에 있었다. 가까이 붙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둘 사이를 장사꾼이 비집고 지나가도 그녀는 다시 같은 거리에 섰다.
“저 회색 겉옷.”
유란이 낮게 말했다.
진소백은 보지 않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객잔 문가에 있던 사내가 나루터 기둥 옆에 서 있었다. 만두는 손에 없었다. 대신 손등으로 코를 훔치며 배를 살피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의 발끝은 배가 아니라 진소백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인가요?”
“아니.”
“따라붙은 얼굴은 보통 아는 얼굴이 아니죠.”
“네 쪽일 수도 있다.”
“그럴 수도요.”
“태연하군.”
“당신도 별로 놀라지 않잖아요.”
진소백은 대답 대신 배를 골랐다. 가장 큰 배는 사람이 많았다. 숨을 곳이 많고, 눈도 많았다. 작은 배는 빠르지만 삿대 하나가 부러지면 강 한가운데서 멈춘다. 그는 짐이 적은 중간 배를 보았다. 노가 둘, 사공이 셋, 손님이 여섯. 서쪽 강어귀에서 내려 큰길로 이어지는 배였다.
“저 배.”
그가 말했다.
유란은 배를 보더니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너무 보통이에요.”
“그래서 좋다.”
“따라오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텐데요.”
“그럼 더 좋지.”
그녀가 그를 보았다.
“미끼로 쓰겠다는 말이군요.”
“서로 이용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아직 허락한 적 없어요.”
“같은 방향이라며.”
유란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보퉁이 끈을 고쳐 잡았다.
“좋아요. 다만 나도 당신을 이용할 거예요. 내가 찾는 정보상이 당신 이름 추적과 닿아 있으면, 먼저 묻는 건 나예요.”
“먼저 찾는 사람이 먼저 묻는다.”
“공평한 척하네요.”
“공평하다고 한 적 없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하죠.”
둘은 배삯을 냈다. 뱃사공은 진소백의 봇짐에서 삐죽 도드라진 모양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천에 싼 부러진 검의 넓은 손잡이가 짐 밖으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칼붙이 지닌 손님은 배 위에서 꺼내지 마시오. 싸움 나면 곧장 내립니다.”
“물 위에서?”
“헤엄 잘 치면 살아나겠지.”
진소백은 동전을 더 얹지 않았다. 뱃사공도 더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점을 기억해 두었다. 돈을 더 뜯지 않는 사공은 겁이 많거나, 이미 다른 데서 돈을 받았거나, 오늘 빨리 떠나야 할 이유가 있는 자였다.
배에 오르기 전, 유란이 낮게 말했다.
“저 사공은 손톱 밑에 먹물이 있어요.”
“사공에게 먹물이 묻을 수도 있지.”
“노를 잡는 손에요? 왼손 엄지 안쪽만?”
진소백은 사공의 손을 다시 보지 않았다. 이미 본 것으로 충분했다. 배 옆구리에 붙은 낡은 표식, 밧줄 매듭의 새로움, 사공 셋 중 하나만 강물을 보지 않는 점. 수향을 떠나는 길에는 너무 많은 눈이 놓여 있었다.
“내려서 걷자고 하면?”
유란이 물었다.
“늦다.”
“그래도?”
“늦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나쁠 때가 있다.”
그는 배에 올랐다. 발밑 판자가 물을 머금어 미끄러웠다. 유란도 뒤따랐다. 배 안의 손님들은 각자 자리를 차지했다. 도자기 상자를 끌어안은 노인, 닭장 두 개를 가진 소년, 품속을 계속 만지는 장사꾼, 그리고 말없이 모자를 눌러쓴 사내 둘. 회색 겉옷의 사내는 아직 나루터에 있었다. 배를 타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사내 하나가 마지막에 뛰어올랐다. 젖은 바짓단, 빈손, 숨을 크게 쉬지 않는 사람. 진소백은 그를 보며 자리를 잡았다. 유란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닭장 하나가 놓였다. 닭이 푸드덕거리며 깃을 털었다.
배가 밀려났다.
수향의 나루터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물살은 겉으로 잔잔해 보였으나 배 밑을 치는 힘은 일정하지 않았다. 노가 물을 가를 때마다 짧은 물방울이 튀었다. 진소백은 강둑의 움직임을 보았다. 회색 겉옷은 기둥 옆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를 오래 볼 필요는 없었다.
“왜 그 배를 보냈을까요?”
유란이 닭장 너머로 말했다.
“우리가 탄 걸 확인했으니까.”
“그럼 이 배 안에 누가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고, 강어귀에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늘 반만 말해요.”
“너도 그렇다.”
“나는 필요한 만큼만 말해요.”
“나도.”
닭장 속 닭이 다시 날개를 쳤다. 소년이 당황해 줄을 붙잡았다. 유란은 닭장 모서리가 미끄러지기 전에 손끝으로 살짝 밀어 바로 세웠다. 소년이 고개를 꾸벅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가 중간 물길로 들어서자 나루터의 소리는 멀어졌다. 대신 사공들의 낮은 구령이 들렸다. 오른쪽 노를 잡은 사공이 한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습관치고는 잦았다. 진소백은 사공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에게는 뽑을 칼도 없었지만, 앉은 발끝만은 언제든 일어설 수 있게 두었다.
“오래된 흔적이라 했지.”
그가 말했다.
유란은 강물을 보고 있었다.
“네.”
“무덤인가.”
“아니요.”
“물건인가.”
“때로는요.”
“사람인가.”
“사람이 지나간 자리일 수는 있죠.”
“그 정보상은 그걸 안다?”
“알거나, 아는 사람에게 닿을 수 있어요.”
“이름은?”
유란은 그를 보았다.
“그건 아직 안 돼요.”
“내 이름 추적과 겹친다면서.”
“방향이 겹친다고 목적지가 같은 건 아니에요. 같은 길을 걷는다고 같은 문으로 들어가진 않죠.”
진소백은 그녀의 대답을 더 밀지 않았다. 밀어 보아야 벽이 나올 때가 있다. 그 벽의 두께를 아는 것도 수확이었다.
도자기 상자를 끌어안은 노인이 기침을 했다. 장사꾼은 품속을 만지다 말고 진소백 쪽을 곁눈질했다. 모자 쓴 사내 둘은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의 신발 밑창에 붉은 흙이 묻어 있었다. 수향의 진흙은 검었다. 붉은 흙은 서쪽 둔덕에서 묻어오는 빛이었다.
이미 갔다 온 자인가, 아니면 거기서 온 자인가.
배가 강 가운데 작은 모래톱을 지날 때, 사공 하나가 일부러 노를 늦췄다. 배가 살짝 틀어졌다. 그 순간 모자 쓴 사내 하나가 일어나려 했다. 진소백의 손이 닭장 위에 놓였다. 닭들이 소리를 냈다. 사내의 시선이 닭장으로 떨어졌다.
“앉아.”
진소백이 말했다.
사내는 굳었다. 다른 손님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사내는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다리가 저려서.”
“앉아서 풀어.”
유란이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배 안의 빈틈을 정확히 찔렀다.
사내는 다시 앉았다. 사공이 노를 바로잡았다. 배는 모래톱을 지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선명해졌다. 이 배에는 우연이 너무 많았다.
강어귀에 닿을 때까지 더는 말이 없었다. 내릴 곳이 가까워지자 손님들이 하나둘 짐을 챙겼다. 진소백은 가장 늦게 일어났다. 유란도 늦었다. 둘은 배에서 내려 진흙이 덜한 돌길로 올라섰다. 서쪽 큰길은 버드나무 줄 사이로 길게 이어졌다. 멀리 수레바퀴 자국이 말라 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갈라질 수도 있어요.”
유란이 말했다.
“네 정보상은 서쪽이라며.”
“서쪽에도 길이 두 갈래예요. 큰길과 옛길.”
“나는 큰길을 본다.”
“나는 옛길을 확인해야 해요.”
“그럼 갈라지면 되겠군.”
진소백은 그렇게 말하고도 바로 걷지 않았다. 큰길 초입의 주막 앞에 말 세 마리가 묶여 있었다. 그중 한 마리 안장끈이 새것이었다. 주막 처마 아래에는 회색 겉옷이 없었다. 대신 붉은 흙 묻은 신발의 사내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배에서 먼저 내린 뒤 돌아간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유란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내를 보지 않은 사람처럼 옛길 쪽 나무 기둥을 살폈다. 기둥에는 오래된 장승의 얼굴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 누군가 새로 긁은 작은 선 세 개가 있었다. 진소백은 그것이 원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큰길에도 묻는 눈이 있고, 옛길에도 남겨진 눈이 있군.”
그가 말했다.
유란은 기둥에서 손을 뗐다.
“그래서 두 갈래죠.”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말인가.”
“아니요. 잠시 함께 가자는 말이에요. 큰길로 가다가 해 지기 전에 옛길로 꺾으면 둘 다 확인할 수 있어요. 당신은 길목의 이름을 보고, 나는 남은 흔적을 봐요.”
“시간이 늦어진다.”
“혼자 가면 더 늦어질 수도 있어요. 배 안에서처럼.”
진소백은 주막 앞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물그릇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 손이 젖지 않았다. 물을 마신 척만 한 것이다.
“네가 얻은 건 나와 나눌 건가.”
“필요하면요.”
“필요하지 않으면?”
“묻기 전에 빼앗아 보세요.”
진소백은 그녀를 보았다. 유란은 도발하듯 웃지 않았다. 그 말은 장난처럼 놓였으나 물러날 자리를 남기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걷자는 제안이었다.
“좋다.”
그가 말했다.
“해 질 때까지다.”
“해 지기 전까지요.”
“말장난은 길에서 해.”
“길에서 더 잘 들리잖아요.”
둘은 큰길로 들어섰다. 나란히 걷지는 않았다. 진소백이 반 걸음 앞, 유란이 사선 뒤. 뒤따르는 자가 있으면 먼저 보는 자리였고, 앞에서 막는 자가 있으면 먼저 피하는 거리였다. 어느 쪽이 먼저 정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큰길 옆에는 낮은 논과 버려진 움막이 이어졌다. 가끔 수레가 지나가며 흙탕물을 튀겼다. 진소백은 길목마다 글자가 적힌 나무패를 보았다. 어떤 것은 오래되어 칠이 벗겨졌고, 어떤 것은 새로 갈아 끼운 듯 못자국이 깨끗했다. 이름은 흔적을 남긴다. 바뀐 이름은 더 큰 흔적을 남긴다. 그는 마음속에서 몇 개를 지우고 몇 개를 남겼다.
유란은 표지판보다 길가의 돌과 나무 밑을 보았다. 오래된 흔적을 좇는다는 말은 허튼말만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가끔 멈춰 흙을 보거나, 지나간 수레바퀴가 남긴 깊이를 눈으로 재었다. 그러나 무엇을 찾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검.”
한참 뒤 유란이 말했다.
진소백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또 그 얘기인가.”
“어제는 묻지 않았어요.”
“지금도 묻지 마.”
“묻는 게 아니라 말하는 거예요. 그걸 아는 눈이 붙을 거예요. 이미 붙었고.”
“너처럼?”
“나처럼.”
그녀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진소백은 잠시 더 조용해졌다.
“왜 붙었지.”
“내가 좇는 흔적과 닮은 데가 있어서요.”
“구체적으로.”
“아직은 안 돼요.”
“그 말도 두 번째군.”
“세 번째부터는 값을 받을게요.”
그는 피식 웃을 뻔하다가 그만두었다. 웃음은 길에서 흔적이 된다. 대신 길가 주막이 보이자 걸음을 멈췄다.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으나 배를 탄 뒤 속이 비어 있었다. 주막은 낮고 허름했다. 처마 아래 말린 고추가 걸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치는 소리가 났다.
“먹고 간다.”
“나는 물만.”
“마음대로.”
주막 안에는 손님이 셋뿐이었다. 진소백은 벽을 등지는 자리에 앉았다. 유란은 문이 보이는 옆자리에 섰다가 앉지 않고 물동이 쪽으로 갔다. 주인이 국수 두 그릇을 권했으나 진소백은 하나만 시켰다. 유란은 물을 받아 마셨다.
국수가 나오기 전, 진소백은 뒷간이 어디냐고 물었다. 주인은 뒤뜰을 가리켰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퉁이를 들지 않았다. 대신 품속을 한 번 눌러 확인했다. 접힌 명단이 갈비뼈 아래 그대로 있었다. 유란은 물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도망가진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쫓아오면 되지.”
“믿음이 없네요.”
“믿으려고 같이 가는 게 아니다.”
“그건 마음에 드네요.”
진소백은 뒤뜰로 나갔다. 뒷간까지 가는 길은 짧았다. 그러나 그는 문을 닫지 않았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주막 뒤의 장작더미와 낮은 담이 보였다. 담 너머에는 큰길이 아니라 논두렁이 있었다.
그가 물소리를 흉내 내며 잠시 서 있을 때, 장작더미 쪽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유란이었다.
그녀는 주막 뒤편으로 나와 있었다. 진소백이 나간 것을 확인하러 온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쪽에 볼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는 담장 가까이에 서서 손을 들었다. 손짓은 짧았다. 새를 부르는 손짓도, 사람을 쫓는 손짓도 아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접혔다 펴지고, 손목이 한 번 돌아갔다.
그뿐이었다.
담 너머에서 누가 받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없었다. 바람이 고추줄을 흔드는 소리만 났다. 유란은 곧 손을 내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동이 쪽으로 돌아갔다. 움직임은 빠르지 않았고, 숨기려 애쓰는 티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늦게 보았다면 놓쳤을 것이다.
진소백은 문을 밀고 나왔다. 발소리를 냈다. 유란은 주막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이 뒤뜰 한가운데서 맞았다.
“길이 막혔나요?”
그녀가 물었다.
진소백은 장작더미를 지나 담 쪽을 보았다. 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논두렁은 비어 있었다. 멀리 허수아비 하나가 젖은 옷을 걸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는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국수는 이미 나와 있었다. 김이 올라왔다. 유란은 다시 물잔을 들었다. 손가락은 젖어 있었고, 손목에는 아무 표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소백은 젓가락을 들었다.
“유란.”
“네.”
“해 지기 전까지라고 했지.”
“그랬죠.”
그는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 올렸다. 면발 사이에서 뜨거운 김이 흩어졌다.
“그 전에 누구를 만날 예정이면 미리 말해.”
유란은 물을 마시지 않았다. 잔을 입가에 둔 채 잠깐 멈추었다.
“만날 사람이 있었으면 혼자 갔겠죠.”
“그럼 방금 건?”
그녀는 잔을 내려놓았다. 대답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주막 주인이 뒤에서 반죽을 치는 소리가 세 번 울렸다. 밖에서는 수레 하나가 지나가며 바퀴가 돌을 씹었다.
“바람을 본 거예요.”
유란이 말했다.
진소백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도 피하지 않았다.
“바람은 손짓을 받나.”
“어떤 바람은요.”
진소백은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국수는 식기 전에 먹어야 했다. 길은 해 지기 전에 꺾어야 했다. 그리고 유란은 방금,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누군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 화, 어떠셨나요?
미리보기 — 댓글은 지금 이 브라우저에만 임시로 저장됩니다. 배포하면 Cloudflare에 저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