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HUMBLE — THE WHOLE STORY

우리는 디자인이 아니라,
이야기를 판다.

여행을 떠난다. 마주친 장면을 그날 밤 노트에 잉크로 급하게 낙서한다. 잘 그리려고가 아니라 잊지 않으려고. 다듬지 않은 그 선이 등판 그래픽이 되고, 여행 하나가 시즌 하나가 된다. 이 페이지의 모든 이야기는 실화다 — 지어낸 문장은 한 줄도 없다. 그리고 원칙은 하나. 시즌이 끝난 그래픽은 다시 발매하지 않는다. 그 여행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S03 이베리아 · 현재 S04 세렝게티 · NEXT S02 튀르키예 S01 유럽
SEASON 03 — IBERIA · 2025.05.30 ~ 06.13 · 현재 시즌

언덕, 타일, 그리고 낙서.

2025년 5월 29일 밤, 리스본의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새벽까지 젊은 여행자들이 드나드는 복도 소리를 들으며, 이번엔 혼자라는 걸 실감했다. 리스본에서 신트라로, 포르투로, 국경을 넘어 말라가와 론다, 그라나다, 세비야까지 — 보름짜리 이베리아 반도 종단이었다.

매일 밤 침대에 엎드려 노트를 폈다. 그날 마주친 장면 중 하나를 잉크로 급하게 낙서했다. 잘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잊지 않으려고 그렸다. 보름 뒤 노트에는 낙서가 가득했고, 그중 다섯 장면이 살아남아 이 시즌의 등판이 됐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던 여행 — 이 다섯 장이 그 증거다.

TRAM 28 도안
LISBOA — 2025.05.30

TRAM 28 리스본 노란 트램

“UPHILL ANYWAY”

여행 첫 아침이었다. 가이드 투어를 들으러 호시우 광장으로 가다가 이어폰을 안 챙긴 걸 깨닫고 숙소까지 뛰어갔다 왔는데도, 약속 시간 8시 45분에 딱 맞게 도착했다. 그 광장 근처에서 처음 봤다 — 노란 퍼니큘라가 말도 안 되는 경사의 언덕을 덜컹거리며 기어오르는 걸.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도시 곳곳에서 같은 노란색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리스본은 일곱 언덕의 도시다. 트램은 편해서 타는 게 아니라,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였다. 백 년 넘은 나무 궤도차가 내리막이 편한 걸 알면서도 매일 오르막을 오른다. 그날 밤 노트에 쓴 한 줄 — 오르막이어도 간다.

그래서 가장 가파르게 기울어진 순간의 트램을 그렸다. 선은 다듬지 않고 낙서의 거친 결 그대로 뒀고, 골드는 헤드라이트 한 곳에만 얹었다. 오르막에서도 불을 켜고 가는 쪽은 언제나 앞이니까. 노트의 문장은 스프레이 드리핑으로 등판에 그대로 옮겼다. 그렇게 UPHILL ANYWAY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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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DINE 도안
LISBOA — 2025.05.31

SARDINE 정어리 캔

“PACKED WITH PRIDE”

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날이었다. 아침 8시 기차로 신트라에 가서 헤갈레이라 별장의 나선형 지하 우물에 그날 1등으로 입장했고, 호카곶에서 대륙의 서쪽 끝을 밟았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흘러간 하루 — 그런데 이 날을 결정지은 건 계획에 없던 마지막 한 시간이었다.

밤에 리스본으로 돌아오니 숙소 골목이 소란스러웠다. 숯불 연기, 골목마다 정어리 굽는 냄새 — 6월 리스본의 정어리 축제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날 기념품 가게에서 알록달록한 정어리 캔들이 훈장처럼 진열된 걸 봤다. 작은 생선 한 마리를 이토록 당당하게, 자부심으로 담아 파는 도시라니.

노트에 캔을 그렸다. 뚜껑을 반쯤 열어둔 채로 — 열어봐야 아는 가치가 있으니까. 골드는 그 뚜껑에만 줬다. 작아도 당당하게. PACKED WITH PRIDE는 그 골목의 냄새와 소음에서 나온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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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ZULEJO 도안
PORTO — 2025.06.03

AZULEJO 포르투 아줄레주

“TILE BY TILE”

포르투 사흘째 아침, 8시 30분에 대성당 앞에서 전날 투어에서 만난 동행과 만나기로 했다. 그가 늦는다는 연락에 성당 앞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 들고 기다렸다 — 그 기다림이 이 디자인을 만들었다. 눈앞의 벽면 가득, 파란 아줄레주 타일이 아침 햇빛을 받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손바닥만 한 타일 한 장 한 장이고, 물러서면 거대한 벽화다. 수백 년 동안 누군가 한 장씩 붙여서 만든 그림. 그날 오후엔 트램을 타고 바다까지 갔다가 앞이 유리로 뚫린 2층 버스로 돌아왔지만, 하루가 끝나도 머리에 남은 건 그 벽이었다.

낙서에는 타일 패턴에서 한 장이 떨어져 나오는 순간을 담았다. 떨어지는 그 한 장만 골드다. 큰 그림은 늘 한 장부터 시작되니까.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블루를 남겨둔 디자인이기도 하다 — 아줄레주의 인디고는 지워서는 안 되는 색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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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EVO 도안
RONDA — 2025.06.07

NUEVO 론다 누에보 다리

“GO BELOW”

말라가에서 버스 게이트를 두 번이나 잘못 안내받고 출발 12분 전에 13번 게이트까지 뛰어서 겨우 론다에 닿았다. 그렇게 도착한 첫날 저녁, 누에보 다리를 위에서 봤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돌다리 —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퇴실이 남들보다 한 시간 빠른 10시였고, 기차표를 바꾸려다 실패해서 반나절이 통째로 비었다. 그 계획에 없던 반나절에 협곡 아래로 끝까지 내려갔다. 과달레빈 강에 발을 담그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알았다 — 어제 본 건 이 다리가 아니었구나. 아래에서 올려다본 각도가 진짜였다.

그래서 시점을 협곡 바닥에 뒀다. 다리를 위에서 본 사람은 많지만 발을 담그고 올려다본 사람은 적으니까. 아치 틈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이 디자인의 골드다. 남들이 보는 데서 한 층 더 내려가 볼 것 — GO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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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HAMBRA 도안
GRANADA — 2025.06.08

ALHAMBRA 알함브라

“LOSE & FIND”

론다에서 그라나다까지 아홉 시간을 이동한 다음 날, 알함브라에 올랐다. 이슬람 궁전의 아라베스크, 아치 너머의 아치 — 그리고 어딘가에서 50만 원짜리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 왔던 길을 되짚으며 반나절을 찾았지만 없었다.

포기하고 다시 궁전을 걷는데, 같은 코스를 돌던 여행자와 자꾸 마주쳤고, 어느 아치 아래에서 결국 말을 텄다. 그날 저녁을 같이 먹었다. 선글라스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면 없었을 인연이었다. 여행의 계산법은 늘 이런 식이다 — 잃은 것보다 얻은 게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잃어버린 선글라스를 아치 창턱 위에 올려서 그렸다. 지금도 어딘가에 그렇게 놓여 있을 테니까. 렌즈에 반사되는 골드는 그날 얻은 것들이다. 잃음과 얻음이 한 그림 안에 있다 — LOSE & F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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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ON 04 — SERENGETI · 2026.09 · NEXT SEASON

다음 노트는, 세렝게티에서.

아직 쓰이지 않은 노트다. 2026년 9월, 이번엔 아프리카다. 초원의 동물들, 적도 위의 설산 킬리만자로, 천 년을 서 있는 바오밥나무를 직접 만나러 간다.

돌아오면 그 장면들이 다섯 장의 티셔츠가 된다.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 그게 이 브랜드가 시즌을 만드는 방식이다. 얼룩말은 떠나기 전에 미리 그려본 프리뷰. 진짜 얼룩말을 만나면 이야기가 완성된다.

ZEBRA 도안
SERENGETI — COMING 2026.09

ZEBRA 얼룩말 (프리뷰)

“STAY BOLD”

얼룩말은 수백 마리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도 줄무늬는 단 한 마리도 같지 않다고 한다. 무리에 있어도 무늬는 각자의 것 — 9월에 초원에서 직접 확인할 예정이다.

미리 그려본 프리뷰에서는 얼룩말을 보드 위에 올렸다. 삐뚤게 얹힌 골드 왕관은 '왕관은 스스로 쓰는 것'이라는 뜻.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 그림에 진짜 이야기가 붙는다.

SEASON 02 — TÜRKIYE · 2024.10 · 시즌 종료

바람, 구름, 그리고 낙서.

2024년 10월의 튀르키예는 계획대로 된 게 거의 없는 여행이었다. 카파도키아의 벌룬은 사흘 내내 뜨지 않았고, 배는 잘못 탔고, 잠바는 바다에서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 돌아와서 노트를 펴 보니 남은 건 전부 계획 밖의 장면들이었다. 구름 위에서 뛰어내린 오후, 뱃머리의 문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갈라타 다리 위의 쌍무지개. 이 시즌의 다섯 그래픽은 그렇게 어긋난 계획들의 기록이다. 시즌은 종료되었고, 그래픽은 아카이브로만 남는다.

BALLOON 도안
GÖREME — 2024.10

BALLOON 카파도키아 열기구

“RISE ANYWAY”

괴레메에 도착한 날부터 매일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그리고 매일 같은 소식을 들었다 — 오늘도 바람 때문에 벌룬이 안 뜬다. 수백 개의 열기구가 새벽 하늘을 채운다는 그 유명한 장면을 보러 갔는데, 머무는 내내 하늘은 끝까지 비어 있었다.

대신 다른 것들을 봤다. 테라스에서 돌산들이 아침 햇빛에 천천히 색을 바꾸는 것, 로즈밸리의 붉은 바위 계곡, 석양 속에서 몰았던 ATV의 먼지. 벌룬 없이도 카파도키아는 카파도키아였다. 그래도 마지막 새벽, 빈 하늘을 보면서 노트에 벌룬을 그렸다.

못 본 것은 그리면 되니까. 요정굴뚝 바위 위로 떠오르는 벌룬 한 개 — 현실에선 뜨지 못한 걸 그림 속에서 띄웠다. 버너 불꽃의 골드는 '그래도 떠오른다'는 고집이다. RISE ANY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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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LIDE 도안
FETHIYE — 2024.10.12

PARAGLIDE 구름 위의 신선

“ABOVE CLOUDS”

안탈리아에서 버스로 세 시간 반, 페티예에 내리자마자 숙소에 짐을 던지고 투어 에이전시로 갔다. 당일 예약, 당일 탑승. 130유로에 예약했는데 카드 결제라고 15%를 더 받아서 기분이 상했지만 — 여기까지 와서 안 탈 수는 없었다.

오후 3시 50분, 차를 타고 산을 올랐다. 후기마다 '산길이 무섭다'고 쓴 이유를 몸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최고봉에 내리니 구름이 발 아래에 있었다. 내리자마자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뛰었다. 구름 위를 나는 기분 — 신선이 된 것 같다는 말을 그날 처음 이해했다. 구름을 뚫고 내려가자 에메랄드빛 욜뢰데니즈 블루라군이 발밑에서 빛났다.

노트에는 구름 위의 카나피와 그 아래 라군의 곡선을 그렸다. 골드는 카나피 줄 하나에만 — 하늘에서 나를 붙잡고 있던 단 하나의 선이니까. ABOVE CLOU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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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TRAM 도안
ISTANBUL — 2024.10.17

RED TRAM 이스탄불 빨간 트램

“OLD LINES RUN DEEP”

이스탄불에서 동행과 '무계획 워킹투어'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계획 없이 걷고, 먹고, 보기. 배를 잘못 타서 볼 것 없는 동네를 한 시간 걸었고, 카디코이 시장에서 생선을 먹었고, 바클라바 성지에서 줄을 섰다. 하루가 끝났을 때 만보계는 3만 3천 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걸음의 끝, 이스티클랄 거리에서 빨간 트램을 만났다. 백 년 넘은 선로 위를 여전히 달리는 새빨간 궤도차 — 지친 다리로 한참을 서서 봤다. 오래된 노선일수록 깊게 남는다.

이 디자인에는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레드를 허락했다. 오래된 것의 색은 지우지 않는 게 예의라서. 골드는 헤드라이트. OLD LINES RUN DEEP — 3만 3천 보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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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KEN 도안
ÖLÜDENIZ — 2024.10.14

KRAKEN 욜뢰데니즈 해적선

“NO MAP”

욜뢰데니즈에서 해적선 투어를 탔다. 배에 오르기 전부터 웃음이 났다 — 뱃머리에 사람 키보다 큰 문어 얼굴이 조각돼 있었다. 해적 모자를 쓴 크라켄. 촌스럽고, 완벽했다.

버터플라이 밸리에 배를 대고 투명한 바다에 뛰어들었고, 갑판에서는 거품 파티가 벌어졌고, 그 난리 속에 잠바를 잃어버렸다. 아깝긴 했는데 이상하게 화가 안 났다. 지도도 계획도 없이 노는 날이 여행에서 제일 오래 남는다는 걸 그날 배웠다.

노트에는 그 크라켄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그렸다. 골드는 문어의 한쪽 눈 — 지도 없이 노는 날의 반짝임이다. NO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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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 ×2 도안
GALATA — 2024.10.17

RAINBOW ×2 이스탄불 쌍무지개

“TWICE LUCKY”

무계획 워킹투어의 아침이었다. 9시에 만나기로 한 동행이 벌써 나와 있어서 바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 130리라, 따뜻하고 괜찮았다. 그리고 갈라타 다리를 건너는데,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하나가 아니라 둘.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 위로, 골든혼의 물 위로, 쌍무지개. 한국에서 평생 한 번도 못 본 걸 이스탄불의 흐린 아침에 봤다. 그날 노트엔 영어로 딱 한 줄 남아 있다 — What a wonderful day.

디자인에서는 바깥쪽 무지개를 골드 한 줄로 그었다. 행운이 두 겹으로 올 때 두 번째는 늘 더 흐리지만, 그래서 더 귀하니까. TWICE L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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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ON 01 — EUROPE · 2023.05 · 35일 · 시즌 종료

배낭, 연착, 그리고 낙서.

모든 것의 시작. 2023년 5월, 15kg 배낭 하나에 35일을 담아 런던으로 떠났다. 첫 해외 배낭여행이었다. 공항에서 eSIM이 먹통이 됐고, 유로스타가 취소됐고, TGV가 또 취소됐고, 공항에서 7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도 매번, 결국, 도착했다. 그 35일 동안 밤마다 노트에 낙서를 남기던 습관이 3년 뒤 이 브랜드가 됐다. 첫 여정의 도안들은 아카이브 복원 작업을 거쳐 순차 공개된다.

ARCHIVE도안 복원 예정
LONDON — 2023.05.11

TOWER BRIDGE 런던 타워브릿지

“OPEN UP”

여행 첫날. 히드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미리 사둔 eSIM이 먹통이 됐다. 첫 해외 배낭여행, 인터넷 없음. 다행히 한국에서 캡처해둔 스크린샷 지도가 있었고, 그것만 믿고 지하철을 타고 화이트채플의 호스텔까지 찾아갔다.

짐을 던지고 밤에 나간 템스 강변 — 타워 브릿지가 조명을 받으며 서 있었다. 15kg 배낭의 어깨 통증도, 먹통 유심의 짜증도 그 앞에서 다 잊었다. 여행의 문이 그렇게 열렸다.

도안은 들어올려진 순간의 다리를 그린다. 골드는 다리의 불빛 — 문은 열라고 있는 거니까. OPEN UP.

ARCHIVE도안 복원 예정
PARIS — 2023.05.15

EIFFEL 에펠탑 야경

“LIGHT UP LATE”

새벽 6시, 킹스크로스역의 해리포터 9¾ 승강장엔 카트가 치워져 있었다. 아쉬움을 삼키고 유로스타에 올랐다 —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가 나오는 퍼스트클래스, 300유로가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파리에 입성했는데, 보러 간 직지는 월요 휴관이었다.

대신 밤이 있었다. 야경 투어의 끝, 정각이 되자 에펠탑 전체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5분 동안만. 낮의 파리는 바빴지만 에펠탑은 자기 시간에만, 자기 방식으로 빛났다.

도안은 반짝이는 순간의 에펠탑이다. 골드는 꼭대기의 서치라이트 — 자기 시간에만 빛나는 것들을 위해. LIGHT UP LATE.

ARCHIVE도안 복원 예정
BARCELONA — 2023.05.22

SAGRADA 미완성의 성당

“STILL UNFINISHED”

바르셀로나 사흘째, 가우디 버스 투어의 날이었다. 매일 2만 보씩 걸은 다리를 쉬게 해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 오는 구엘 공원을 지나 오후에 드디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내부로 들어갔다.

1882년부터 140년째 공사 중인 성당. 숲처럼 뻗은 기둥 사이로 스테인드글라스 빛이 쏟아지는데, 머리 위 어딘가에선 여전히 크레인이 돌고 있었다. 미완성이라 부족한 게 아니라, 미완성이라 계속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도안에는 첨탑과 함께 공사 크레인까지 그대로 그린다 — 크레인이 골드다. 완성을 서두르지 않는 것도 태도다. STILL UNFINISHED.

ARCHIVE도안 복원 예정
ZERMATT — 2023.05.24

MATTERHORN 체르마트 마터호른

“EARN THE VIEW”

새벽 3시에 바르셀로나 숙소를 나섰다. 공항버스, 비행기 두 시간, 기차 네 시간, 다시 기차 한 시간 — 총 열 시간을 이동해 오후 3시에 체르마트에 내렸다. 전생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산, 마터호른을 보러.

비가 왔다.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 어디에서도 산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뒤 어딘가에 4,478미터가 서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열 시간을 왔는데, 산은 기다리라고 했다.

도안은 구름에 반쯤 가린 마터호른이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능선 한 줄만 골드 — 어떤 풍경은 기다림까지가 풍경이니까. EARN THE VIEW.

ARCHIVE도안 복원 예정
EUROPE — 2023.05

DELAYED 취소된 기차

“DELAYED, NOT LOST”

런던 마지막 밤, 다음 날 아침 유로스타가 취소됐다는 메일이 왔다. 빨래방에선 세탁기가 말썽이었다. 파리에서는 TGV가 또 취소됐고, 바르셀로나로 가는 날엔 오를리 공항에서 일곱 시간을 연착했다. 35일 동안 교통은 한 번도 내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취소된 기차 때문에 하루 더 머문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었고, 연착한 공항에서 캐나다 모녀와 나눈 대화가 있었다. 늦는 것과 길을 잃는 것은 다르다 — 매번, 결국, 도착했으니까.

도안은 출발 전광판이다. 온통 DELAYED로 가득한 칸들 사이, 단 한 칸만 골드로 빛난다 — ON TIME. 그 한 칸이면 충분하다. DELAYED, NOT L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