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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어머니의 방

문고리가 손바닥 안에서 덜컥 멈췄다. 도경은 잠긴 줄 알고 힘을 빼려다, 안쪽에서 천천히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오래된 나무가 비틀릴 때 나는 낮은 마찰음. 문틈으로 마른 비누 냄새와 데운 보리차 냄새가 먼저 나왔다.

윤서란은 체인을 풀지 않은 채 도경을 보았다. 흰 머리카락은 뒤로 단단히 묶였고, 앞치마 끈은 허리에서 한 번 더 접혀 있었다. 집 안은 예전보다 작아 보였다. 신발장 위의 꽃병, 벽시계, 전화기 옆 메모지는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너무 잘 정돈되어 있어서 사람이 오래 머문 흔적보다 비워 둔 자리들이 먼저 보였다.

"왔니."

"응. 갑자기 와서 미안해."

"전화라도 하지."

도경은 손에 든 작은 과일 상자를 들어 보였다. 사 온 이유가 너무 빤해서, 내려놓기도 전에 민망했다. 윤서란은 체인을 풀고 돌아섰다.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거실 바닥은 닦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미끄러웠다. 도경은 양말 끝에 힘을 주고 걸었다. 식탁에는 컵 두 개가 이미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오지 말라는 사람처럼 말하면서도, 올 경우의 자리를 치워 두었다.

"일은."

"계속해."

"몸은."

"괜찮아."

"네 괜찮다는 말은 대개 안 괜찮을 때 나오더라."

도경은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유리컵은 얇고 차가웠다. 집 안의 소리는 작았다. 냉장고 모터, 벽시계, 주방 쪽에서 끓어오르다 꺼지는 주전자. 바다의 기록실보다 훨씬 적은 소리였는데, 피할 곳은 더 적었다.

윤서란이 보리차를 따랐다. 물줄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뉴스에 그 회사 이름이 또 나오더라. 세이렌."

"내 일은 그쪽 발표하고 다르니까."

"다르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도경은 컵을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안부였다. 서로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이미 다 아는 말만 꺼내는 시간. 어머니는 도경의 어깨 너머 벽시계를 보았다. 나가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래 머물 수 없다는 표시였다.

"엄마."

윤서란의 손이 컵받침 위에서 멈췄다.

"아버지 일 때문에 왔어."

말이 나가자 집 안의 정돈된 선들이 조금씩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윤서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로 컵받침 위치를 맞추고, 다시 한 번 맞췄다.

"그 이야기는 끝났어."

"나한테는 안 끝났어."

"그래서 바다까지 갔니."

도경은 숨을 고르지 않았다. 고르면 약해질 것 같았다.

"남은 물건이 필요해. 현장 노트, 음성펜, 뭐든. 아버지가 마지막에 갖고 있던 것들."

윤서란은 도경을 보지 않고 말했다.

"없다."

너무 빨랐다. 없는 물건을 말하는 속도가 아니었다.

*

"없다고 하지 마."

도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윤서란은 주방 쪽으로 컵을 옮기려다 멈췄다. 어머니의 등은 곧았다. 평생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도 휘지 않던 등,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의 손을 받던 등, 도경이 아버지 이름을 꺼낼 때마다 먼저 닫히던 등.

"있잖아. 유품 목록에 있었어. 내가 그때 어렸다고 전부 못 본 건 아니야."

"네가 본 건 종이였고, 내가 본 건 사람 꼴이 아니게 무너진 집이야."

도경은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나무가 손톱 밑에 딱딱하게 닿았다.

"아버지는 연구자였어."

"연구자였지. 좋은 말이네."

윤서란이 웃었다. 소리는 웃음보다 짧고 말랐다.

"그 사람은 늘 좋은 말 뒤에 숨었어. 관측, 검증, 기록. 네 생일에도 바다에 있었고, 네가 열이 사십 도까지 올랐을 때도 중계선에 있었어. 그러다 돌아오면 무릎을 굽히고 네 눈을 맞췄지. 그러면 넌 다 잊었고."

도경은 기억이 들어오는 걸 막지 못했다. 젖은 외투 냄새. 차가운 손가락. 서도진이 현관에 앉아 도경의 운동화 끈을 다시 묶어 주던 장면. 어른의 키를 접어 아이 높이로 내려오던 사람. "늦었지"라는 말보다 먼저 도경의 젖은 양말을 벗기던 손.

그 기억은 어머니가 말한 사람을 지우지 못했다. 둘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힘들었던 건 알아."

"알면 그만둬."

"그건 다른 얘기야."

"아니다. 같은 얘기야."

윤서란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도경은 그 소리에 어릴 때 밤을 떠올렸다. 부엌에서 낮게 오가던 말들. 문틈 아래로 새던 불빛.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와 어머니의 눌린 목소리. 도경은 그때마다 이불을 턱까지 당기고,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했다.

"그 사람은 너까지 데려가려고 했어."

도경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야."

"바다를 보여 주겠다고. 네가 소리를 잘 듣는다고. 아이한테 그런 말을 했어. 여덟 살짜리한테."

"그건 그냥..."

"그냥이 아니었어. 그 사람한테는 늘 시작만 그냥이었지. 끝은 항상 우리가 감당했어."

도경은 반박할 말을 골랐다. 아버지가 도경에게 수중 녹음기를 귀에 대 보게 한 날, 소리가 물속에서 휘어지는 걸 설명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욕심이 아니라 기쁨에 가까웠다. 하지만 도경은 그 기쁨 뒤에서 윤서란이 설거지 물을 틀어 소리를 덮던 것도 기억했다.

"나는 물건만 보면 돼. 가져가겠다는 게 아니야. 복사하고 돌려줄게."

"그걸로 뭐가 달라지니."

"마지막 기록이 지금 관측 중인 모계하고 연결돼 있어."

윤서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도경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엄마, 알고 있었어?"

"몰라."

"방금 표정이 바뀌었어."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거야."

"그 말, 아버지한테도 했어?"

윤서란이 컵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물이 조금 튀었다.

"네 아버지하고 너를 같은 자리에 놓지 마."

"엄마가 먼저 그랬잖아."

말이 부딪치고 난 뒤, 도경은 입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원망을 정확히 겨누고 싶었는데, 맞은 곳은 오래된 살림 전체였다. 윤서란은 튄 물을 닦지 않았다. 작은 물방울이 식탁 위에서 둥글게 버텼다.

"그 물건들은 네게 줄 수 없어."

"왜."

"네가 그 사람을 다시 믿을까 봐."

도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믿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었다. 동시에, 믿게 만든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서 도경의 손가락은 식탁 모서리만 더 세게 눌렀다.

*

"그 일 그만둬라."

윤서란은 명령처럼 말하지 않았다. 더 나쁜 방식이었다. 오래 준비해 온 문장을 꺼내듯, 낮고 단단했다.

"못 그만둬."

"회사 때문이니. 연구 때문이니. 아니면 네 아버지 때문이니."

"셋 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안 믿어."

도경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자 스스로도 놀랐다.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집에서 흔들리는 쪽은 늘 도경이었다. 오랜만에 온 딸이 손님인지, 조사관인지, 남은 가족인지도 정하지 못한 채 컵만 만지고 있었다.

"바다가 사람을 삼킨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봤어."

윤서란의 시선이 처음으로 도경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네 아버지가 사라진 뒤에, 나는 매일 현관 소리를 들었어. 올 리가 없는데도. 바깥 계단에서 발소리가 나면 밥을 더 데웠고, 전화가 울리면 먼저 숨부터 참았어. 그러다 너를 봤다. 너는 창가에 앉아서 바다 그림만 그렸어."

도경은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다. 자신은 아버지를 기다렸고, 어머니는 기다리는 도경을 봤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문을 보고 있었던 셈이었다.

"나는 너 하나라도 끌어내야 했어."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어?"

"말하면 네가 더 들어갈 테니까."

"엄마가 막아서 내가 멈춘 적 있어?"

윤서란의 입술이 얇아졌다. 도경은 곧바로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는 너무 익숙해서, 조금 늦게 오도록 두었다.

"넌 이미 그 사람을 닮았어."

"그 말로 겁주지 마."

"겁주는 게 아니야. 내가 겁이 나는 거야."

처음으로 말끝이 갈라졌다. 도경은 컵 안의 보리차 표면을 보았다. 작은 떨림이 있었다. 어머니의 손인지, 자신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둘 다였다.

"나는 답을 확인해야 해."

"답 같은 건 없어. 남은 사람만 있어."

"그 남은 사람한테도 알 권리는 있어."

"알 권리로 사람이 사니?"

도경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과학의 문장들은 검증실에서 강했다. 집 안에서는 무뎠다. 현상, 질문, 변수, 대조군. 그런 단어는 서랍장 위에 놓인 오래된 가족사진 앞에서 힘을 잃었다. 사진 속 서도진은 도경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윤서란은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그때는 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가 뭘 숨기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아."

"알면 됐네."

"그럼 줘."

"안 돼."

짧은 거절이었다. 이번에는 흔들림도 없었다.

도경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다시 작게 미끄러졌다. 더 말하면 부탁이 아니라 빼앗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물러서면, 이 집은 또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리해 버릴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도, 유품도, 도경의 질문도.

"오늘은 갈게."

"그래."

윤서란은 붙잡지 않았다. 그게 더 오래 남았다.

도경은 현관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거실장 아래쪽 서랍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안쪽에 종이 상자 모서리가 보였다. 오래된 갈색 상자. 테이프가 누렇게 변했고, 한쪽에 검은 매직으로 날짜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도경은 몸을 굽히지 않았다. 시선만 닿았다.

윤서란이 먼저 움직였다.

*

서랍이 급히 닫혔다. 나무와 나무가 맞물리는 소리가 짧게 집 안을 쳤다. 윤서란의 손은 서랍 손잡이를 붙든 채 굳어 있었다. 도경은 그 손의 관절이 하얗게 눌린 것을 보았다.

"그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걸 그렇게 숨겨?"

"너는 갈 거라며."

도경은 신발장 앞에 서 있었다. 한쪽 신발에 발을 넣고, 다른 발은 아직 맨바닥에 남아 있었다. 문밖으로 나가면 다시 연구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도와 좌표와 판정불가의 문장들. 거기서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을 수 있었다. 이 집에서는 모르는 것이 누군가의 손안에 접혀 있었다.

"20년 동안 갖고 있었어?"

윤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답했다. 도경은 상자의 크기를 떠올렸다. 현장 노트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 음성펜 하나쯤은 충분히 들어갈 크기. 내용은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선명했다.

"엄마."

"부르지 마."

"그 안에 아버지 물건 있어?"

"나가."

도경은 신발을 마저 신지 않았다. 현관과 거실 사이의 낮은 턱이 갑자기 깊은 경계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거실 쪽에, 도경은 문가에 있었다. 거리는 세 걸음도 안 됐지만, 어느 쪽도 먼저 건너지 않았다.

"내가 감당 못 할 거라고 생각해?"

"넌 이미 감당하고 있다고 착각해."

"그럼 엄마는? 엄마는 감당했어?"

윤서란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졌다. 화가 아니라 닫힘이었다. 아주 오래 닫아 둔 방의 문처럼, 안쪽에서 빗장이 걸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너를 키웠어."

그 말 앞에서 도경은 멈췄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시에 그 사실이 모든 것을 덮을 수는 없었다. 도경은 혀끝으로 잇몸 안쪽을 눌렀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 뒤에서 아버지의 녹음기를 몰래 만지던 기억이 스쳤다. 버튼을 누르면 먼 바다의 딱딱한 클릭이 흘러나왔고, 도경은 그 소리를 말보다 먼저 배웠다. 윤서란은 그걸 알았을까.

"상자만 확인하게 해 줘."

"안 돼."

"왜 끝까지 엄마 혼자 결정해?"

"그 사람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윤서란은 서랍 앞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경은 마침내 남은 신발을 신었다. 뒤꿈치가 접혔지만 바로 펴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잡자 금속이 차가웠다.

"다시 올 거야."

"오지 마."

"올 거야. 이번엔 그냥 안 돌아가."

윤서란의 눈이 도경을 붙잡았다. 그 안에는 분노보다 오래된 피로가 있었다. 그러나 피로는 양보가 아니었다. 도경은 그걸 알았다. 어머니는 20년째 무언가를 넘기지 않고 있었고, 지금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도경이 문을 열었다. 복도 공기가 집 안보다 차가웠다. 등 뒤에서 서랍 손잡이가 아주 작게 떨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아직 놓지 않은 것이다.

"도경아."

도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부탁할 것 같았다. 부탁하면 또 어린애가 될 것 같았다.

윤서란의 목소리가 문턱까지 와서 멈췄다.

"그 사람은 우리를 버린 거야."

말은 못처럼 박혔다. 도경은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정리하면 하나였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하나의 상자를, 열지 않았거나 열 수 없었던 시간을, 20년 동안 붙들고 있었다.

질문은 더 좁아졌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도경은 접힌 뒤꿈치를 발로 눌러 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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