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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다시, 이랑에게

수중 드론의 집게가 마지막 표식기 덮개를 열자, 녹슨 번호판이 모래에서 반쯤 드러났다. 도경은 조작석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에는 공개 좌표와 실제 좌표의 차이가 초 단위로 겹쳐 떴다. 숨겼던 위치가 이제 누구의 화면에서도 같았다.

아마라의 음성이 짧게 들어왔다. “고래 측 대리 채널, 수신 유지 중.”

“송신하지 마세요. 영상만 열어 둡니다.”

저주파 송신기는 꺼져 있었다. 해류도 번역 대기 상태였다. 인간이 먼저 말을 밀어 넣지 않기로 한 접촉이었다. 도경은 그 규칙을 세 번 확인했다. 음향 금지구역 안쪽으로 연구선의 능동 핑은 막혔고, 드론은 추진음을 줄인 채 표류에 가깝게 움직였다.

먼저 온 것은 이랑이 아니었다. 어린 개체 둘이 먼 회색 선처럼 지나갔다. 뒤이어 큰 등 하나가 물기둥 바깥을 그었다. 카메라가 따라가려 하자 도경은 자동 추적을 끊었다. 쫓는 화면은 증거가 아니라 습관이었다.

드론 아래로 철거된 센서 지지대의 구멍이 보였다. 모래가 아직 가라앉지 않아 작은 탁류가 남아 있었다. 그 옆으로 고래들이 원을 만들지 않고, 느린 호를 그리며 지나갔다. 확인하는 거리였다. 가까워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

해류가 낮은 알림만 띄웠다.

입력: 비송신 관측 / 공개 좌표 / 센서 철거 후 잔류음 후보: 접근 허용 아님 / 거리 유지 / 행위 확인 p: 0.58 상태: ⟨보류⟩

도경은 후보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허용이 아니라 확인. 말이 아니라 빈자리. 인간 장치가 사라진 자리를 저들이 지나가며 본다. 도경이 내놓은 파일이나 사과문이 아니라, 바닥에 남은 구멍과 꺼진 주파수가 먼저 검사를 받았다.

“모계 7 추정 개체, 북서쪽 410미터.” 도현이 말했다. “능동 식별 안 합니다.”

“그대로 둬요.”

멀리서 낮은 맥동이 한 번 왔다. 번역을 걸기에는 짧았다. 그러나 드론 선체가 아주 약하게 울렸다. 도경은 손목에 찬 압력계를 보았다. 수심, 거리, 잔류 잡음. 모든 숫자는 부족했다. 부족한 상태로 기다려야 했다.

고래 무리는 표식기 자리 세 곳을 차례로 지나갔다. 공개한 위치, 이관한 녹음 묶음, 철거한 센서 격자. 사람이 만든 순서가 아니라 바닥이 증명하는 순서였다. 마지막 자리에서 큰 등은 잠깐 방향을 틀었다. 카메라 렌즈가 검은 피부의 흉터를 놓칠 만큼만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도경은 송신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지 않았다. 이랑이 보고 있다면, 그 손가락까지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누르지 않는 행동만이 오늘 도경이 보낼 수 있는 첫 문장이었다.

*

첫 응답은 말이 아니었다. 세 번의 짧은 클릭 뒤에 긴 정지가 왔다. 해류가 자동 번역을 시작하려 하자, 도경은 실행을 보류로 바꿨다. 원신호만 기록했다.

클릭, 클릭, 클릭 긴 정지 낮은 하강음 끊김

“번역 안 합니까?” 도현이 물었다.

“아직요. 같은 신호를 세 번 이상 받을 때까지.”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놓친 겁니다.”

말이 입안에서 거칠게 부딪혔다. 놓친다는 말은 도경에게 쉽게 나오지 않았다. 평생 더 듣는 쪽으로 훈련받았다. 작은 변조도 건져 올리고, 노이즈 뒤에 숨은 패턴을 찾아내고, 실패한 녹음에서 의미의 가장자리를 복구하는 일이 직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듣지 않는 기술이 필요했다.

두 번째 클릭은 더 멀었다. 이랑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모계의 다른 개체가 사이에 남아 있었다. 호위인지 거리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화면 속 등지느러미들은 서로의 간격을 바꾸며 드론을 중심에서 밀어냈다.

해류가 새 상태를 띄웠다.

입력: 반복 원신호 2회 / 인간 송신 없음 / 접근 거리 유지 후보: 조건부 반응 / 경계 지속 / 요청 검토 p: 0.62 상태: ⟨보류⟩

도경은 ‘조건부’라는 낱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용서라면 더 가까웠을까. 아니, 그런 계산 자체가 사람 쪽 문법이었다. 이랑은 도경의 후회를 검토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지워진 장치와 넘겨진 권한, 닫힌 주파수를 확인하러 왔다. 그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오래된 녹음기가 떠올랐다. 서도진은 집에 돌아오면 물기 마른 손으로 테이프 케이스를 닦았다. 어린 도경이 안아 달라고 다가가도, 먼저 케이스 라벨을 맞췄다. 그 질서가 미웠고, 그 질서를 배웠다는 사실이 더 싫었다. 오늘 도경은 라벨을 붙이지 않고 기다렸다. 손톱 끝으로 조작석의 고무 모서리만 눌렀다.

세 번째 신호가 왔다. 앞선 두 번과 구조는 같았지만, 하강음 뒤에 짧은 맥동이 붙었다. 해류는 이번에도 보류했다. 도경이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번역하면 p가 올라갑니다.” 도현이 말했다.

“올라간 숫자가 신뢰는 아닙니다.”

“위원회 보고에는 필요합니다.”

“위원회보다 먼저 저쪽 조건이 있습니다.”

말하고 나서 도경은 화면 밖 아마라 쪽을 보지 않았다. 이 말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진작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늦었다는 사실은 지금 할 일을 대신해 주지 않았다.

이랑의 그림자가 멀리서 천천히 방향을 바꿨다.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대신 같은 수심을 유지했다. 도경은 그 수심을 접촉 허가로 해석하지 않았다. 다만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만 기록했다. 관계는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새로 놓인 경계선 위에, 아주 좁은 통로 하나가 생겼다.

*

네 번째 신호가 들어오자 해류의 보류 표시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도경은 수동으로 원신호와 이전 세 신호를 나란히 띄웠다. 반복되는 하강음, 긴 정지, 마지막 맥동. 같은 뼈대였고, 끝만 달랐다.

“블라인드 대조 묶음 열어요. 전승 순서만. 의미 번역은 뒤로.”

아마라가 확인했다. “고래 측 채널에 조건을 보냅니다. 인간 측 해석 삽입 없음, 원신호 대 원신호 대조.”

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신은 문장이 아니라 절차였다. 해류는 사람 말 대신 대조 방식만 낮은 비가청 코드로 변환했다. 그마저도 고래 측 신호가 먼저 온 뒤에만 나갔다.

잠시 후 더 긴 코다가 들어왔다. 도경은 몸을 앞으로 숙였다. 화면의 파형이 넓게 벌어졌다가 갑자기 낮아졌다.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 구간이 있었다. 잡음이 빠진 침묵이 아니라, 소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 둔 구조였다.

낮은 맥동, 낮은 맥동 클릭, — 클릭 긴 정지 하강음 넓은 침묵 짧은 맥동, 반복

해류가 처음으로 후보를 냈다.

입력: 모계 7 원신호 / 비송신 접촉 / 전승 순서 대조 후보: 오래된 중단 / 내려가는 자리 / 되돌림 없는 경계 p: 0.57 상태: ⟨보류⟩

도경은 후보를 읽고도 말하지 않았다. p는 낮았다. 그러나 순서는 보였다. 낮은 맥동, 클릭, 긴 정지, 하강음, 넓은 침묵. 지질 보고서의 탄소 꺾임과 저산소층 사이에 놓였던 빈칸이 떠올랐다. 전승은 원인을 설명하지 않았다. 사건의 배열만 한 조각 내밀었다.

“비교 표 열겠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퇴적층 자료가 오른쪽에 붙었다. 검은 띠, 황화물 증가, 미생물 흔적, 산소 동위원소 변화. 도경은 두 화면을 억지로 맞추지 않았다. 시간 단위가 달랐다. 고래 전승은 세대의 길이로 남았고, 지층은 압력과 침전의 속도로 남았다. 같은 선 위에 놓는 순간 거짓 정밀도가 생겼다.

“같다고 쓰지 마세요.” 도경이 말했다. “순서 후보가 겹친다고만.”

아마라가 바로 받아 적었다. “조건부 협력 기록. 전승 전모 요구 금지.”

그 문장이 필요했다. 더 달라고 압박하면 통로는 닫힌다. 도경은 다음 질문을 삼켰다. 첫 침묵의 앞뒤, 누가 있었는지, 왜 하강음 뒤에 비어 있는지. 모두 묻고 싶었다. 묻고 싶다는 사실만으로 물을 권리는 생기지 않았다.

이랑은 다시 짧게 울렸다. 이번에는 해류가 번역하지 못했다. 상태창에 오류가 떴다.

입력: 단발 원신호 / 맥락 부족 후보: 식별 불가 p: 0.31 상태: ⟨오류⟩

도경은 오류창을 닫지 않고 저장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남기는 일도 기록이었다. 이랑이 준 것은 전승 전체가 아니었다. 닫힌 문 안에서 나온 작은 조각이었다. 도경은 그것을 증거처럼 움켜쥐지 않으려 손을 뒤로 뺐다.

“오늘 접촉은 여기까지.” 도경이 말했다. “추가 요청 안 합니다.”

도현이 늦게 대답했다. “기록 중지합니다.”

화면 속 고래들은 천천히 흩어졌다. 이랑은 마지막까지 등을 보이지 않았다. 정면도 아니었다. 비스듬한 거리. 그 거리만큼이 오늘 허락된 대화였다.

*

저녁의 검증실은 물소리 대신 냉각팬 소리만 났다. 도경은 젖은 장갑을 벗어 장비함 위에 올려놓고, 원신호 네 묶음을 잠금 폴더에 넣었다. 접근권자는 도경이 아니었다. 대리기구와 심의부 공동 승인. 손가락은 습관처럼 개인 주석란으로 갔다가 멈췄다.

보고서 첫 줄은 짧았다. 모계 7은 복구 행동 확인 후 제한적으로 응답했다. 도경은 ‘복구 행동’ 앞에 ‘사과’라는 말을 넣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다. 이랑은 도경의 마음을 받아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듣기 위해 박아 둔 장치를 줄였는지 확인했다. 그 차이를 흐리면 다시 대신 결정하는 일이 된다.

유리문 밖에서 아마라가 들어왔다. “고래 측 대리 채널에서 조건을 남겼습니다. 다음 접촉도 저쪽 신호 우선. 인간 측 질문은 한 번에 하나.”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자료는 공개 보고서에 전부 싣지 않습니다. 약한 구간은 심의부 비공개 부속으로.”

도경은 잠깐 입술을 눌렀다. 공개해야 세이렌이 덜 비튼다. 그러나 원신호를 모두 내놓는 순간, 또 다른 포획이 시작될 수 있었다. “순서 후보와 절차만 공개합니다. 원신호 전문은 공동 보관.”

아마라가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됩니다.”

그 말에 안도하지 않았다. 충분함은 신뢰가 아니었다. 겨우 다음 손상을 막는 선이었다.

도경은 서도진의 마지막 기록 폴더를 열었다. 파일 목록만 보였다. 재생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하강음의 끊김과 오늘 이랑이 내민 긴 정지가 서로 닮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서, 도경은 폴더를 닫았다. 아버지를 증거의 지름길로 쓰면 안 된다. 원망도 그리움도, 검증 절차보다 먼저 놓을 수 없었다.

해류가 두 자료의 대조 준비 상태를 띄웠다.

입력: 전승 순서 후보 / 퇴적층 사건 배열 / 접근 제한 후보: 순서 대조 가능 / 의미 확정 불가 / 추가 조각 필요 p: 0.64 상태: 검증 가능

도경은 ‘의미 확정 불가’에 표시를 했다. 오늘 얻은 답은 좁았다. 등 돌린 고래는 다시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하게 만든 것은 용서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대신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은 행동이었다. 남은 질문도 좁고 단단했다. 전승의 순서와 지층의 순서가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가.

보고서 마지막 칸에 상태를 적었다. 관계 회복 아님. 조건부 재접촉. 위험 원인 낙인 유지.

문장이 차가워 보였지만 지우지 않았다. 도경은 여전히 저들에게 위험의 원인이었다. 그것을 부드럽게 바꾸면 다음 판단이 흐려진다. 화면을 저장하자 잠금 표시가 붙었다. 잠긴 파일 옆에 새 대조 폴더가 생겼다. 이름은 단순했다. 전승과 지층.

도경은 불 꺼진 수조 화면을 한 번 더 보았다. 검은 물 위에 파형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낮은 맥동, 긴 정지, 하강음, 넓은 침묵. 이랑이 연 조각은 그만큼이었다. 도경은 그 이상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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