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많아
낮의 강은 밤보다 조용했다.
밤이면 물소리가 골목을 기어 다니며 문턱마다 손가락을 얹는 것 같았으나, 낮에는 햇빛이 그 소리를 눌렀다. 물비린내도 엷어지고, 젖은 널판도 조금은 사람 사는 길처럼 보였다. 진소백은 약낭을 허리에 묶고 하 노인의 집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문짝은 지난번보다 더 얌전했다. 누군가 뒤진 흔적은 치워져 있었다. 뒤집혔던 광주리는 바로 놓였고, 흩어진 짚도 한쪽으로 쓸려 있었다. 하지만 집이 말끔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처가 딱지를 만들었을 뿐, 살은 아직 아래에서 곪고 있었다.
“하 어르신.”
안에서 오래된 헛기침이 들렸다.
“누구냐.”
“접니다. 소백입니다.”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은 손바닥 하나만큼 벌어졌다가, 노인의 눈이 먼저 나왔다. 그 눈은 낮에도 밤빛을 품고 있었다. 진소백을 알아본 뒤에야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대낮에 왜 왔느냐.”
“상처를 봐야 합니다.”
“괜찮다.”
“괜찮으면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보고 괜찮으면요.”
하 노인은 입술을 오므렸다. 투덜거림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꺼진 듯했다. 그는 몸을 비켜 주었다. 진소백은 안으로 들어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노인이 문틈 밖을 한참 살피는 기척을 느꼈다.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렸다. 낮인데도 빗장 소리가 지나치게 컸다.
방 안은 축축했다. 강가의 집이란 늘 그런 것이라지만, 오늘은 눅눅한 냄새에 피와 오래된 약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진소백은 보따리를 벽 쪽에 내려놓고 약낭을 풀었다.
“앉으십시오.”
“내 집에서 네가 앉으라 마라냐.”
“그러면 누우십시오.”
“그건 더 싫다.”
노인은 툴툴거리면서도 낮은 걸상에 앉았다. 팔을 걷자 며칠 전 긁힌 상처가 드러났다. 살갗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가장자리 한 군데가 붉게 부어 있었다. 진소백은 물을 데우고, 천을 적셔 조심스레 닦았다. 하 노인은 처음에는 이를 악물었고, 나중에는 조금씩 숨을 내쉬었다.
“손이 차다.”
“물은 따뜻합니다.”
“네 손 말이다.”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이 찬 것은 어제부터였다. 객잔 이불 속에서도 손끝이 잘 데워지지 않았다. 곽서의 목소리가 손가락 마디마다 묻어 있는 듯했다. 질서. 손목. 잘린 손발. 그는 그런 말을 떠올리지 않으려 약초를 더 곱게 비볐다.
“고름이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은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언제는 마시라 했느냐.”
“안마신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 노인이 힐끗 보았다. 노인의 눈가가 아주 잠깐 접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약했고, 주름이 제자리를 찾는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래도 진소백은 그 작은 움직임을 보았다. 하 노인이 자신에게 문을 열어 주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졌고, 상처를 내맡기는 손이 조금 덜 떨렸다. 그것만으로도 이 며칠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싶었다.
상처에 약을 얹고 천을 감았다. 매듭을 너무 세게 묶지 않았다. 늙은 살은 어린 살보다 쉽게 성을 냈다.
“이틀 뒤 다시 갈아야 합니다. 붉은 기가 넓어지면 그 전에도 부르십시오.”
“누구를 시켜서?”
“약방에 말해 두겠습니다.”
“그 약방 주인 놈은 입이 가볍다.”
“주인 말고 저를 부르라고 하십시오.”
하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거절하지 않았다.
진소백은 약낭을 닫지 않고 한동안 손을 그 위에 얹어 두었다. 할 말은 손바닥 아래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13화의 그 처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빈손으로 가지 말라. 스승의 이름을 팔지 말라. 그 말은 며칠 동안 그의 뒤통수에 매달려 있었다.
스승님의 이름은 칼보다 날카로웠다. 함부로 꺼내면 남을 베기 전에 자신을 먼저 베었다.
진소백은 보따리를 끌어당겼다. 하 노인의 눈이 곧장 좁아졌다.
“뭘 하려느냐.”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볼 것 없다.”
“하 어르신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없다니까.”
“이름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하 노인의 입이 다물렸다.
진소백은 보따리 안쪽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손이 먼저 닿은 것은 부러진 검의 싸늘한 등줄기였다. 그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천을 한 겹 더 젖히자 낡은 편지와 백옥 비녀가 손끝을 스쳤다. 마지막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오래 만질수록 닳을까 두려워 늘 천 사이에 넣어 두었던 종이였다.
스물셋의 이름이 있는 명단.
자기 이름 곁에 낯선 글자 하나가 붙어 있는 종이.
그는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하 노인 앞에 놓았다. 방 안의 빛이 낮았으므로 글자는 또렷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 노인은 보자마자 몸을 뒤로 뺐다.
“그게 뭐냐.”
“저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모르는 걸 왜 나한테 가져오느냐.”
“하 어르신은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실 수 있으니까요.”
말이 너무 곧게 나갔다. 진소백은 스스로도 놀랐다. 하 노인은 그 말을 꾸짖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을 뻗었다가, 손끝이 종이에 닿기 직전 멈췄다.
“네 것이냐.”
“제게 남겨진 것입니다.”
“누가.”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 노인은 그 침묵을 알아들었다. 그의 어깨가 굳었다.
“그 이름은 말하지 말랬지.”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묻어 나온다. 죽은 사람 이름이란 원래 그렇다.”
진소백은 눈을 내리깔았다. 종이 위의 이름들은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것이 오히려 방 안을 채웠다.
하 노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종이를 집었다. 손마디가 갈대처럼 말랐고, 손톱 밑에는 강흙이 오래 박혀 있었다. 그는 눈을 찡그리며 명단을 가까이 가져갔다. 처음에는 글자를 읽는 듯했고, 이내 읽는다기보다 더듬는 듯했다. 손가락 하나가 첫 줄에서 멈췄다가 다음 줄로 내려갔다. 다시 그다음 줄.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진소백은 숨을 죽였다.
하 노인의 손가락은 이름 하나하나 위를 지나갔다. 세는 사람의 손이었다. 무엇을 찾는 손이기도 했다. 글자의 획을 짚는 것이 아니라, 빈 곳과 채워진 곳 사이를 더듬는 듯했다. 어느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다시 처음으로 올라갔다. 손가락이 한 번 더 내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빨랐다. 중간에서 한 번 엇나가더니, 끝줄에 닿았을 때 노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나가…… 많아.”
소리가 너무 작아 물소리와 섞일 뻔했다. 그러나 진소백은 들었다. 그 말이 방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가슴께에 박혔다.
“무엇이 많다는 겁니까?”
하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마지막 줄에 붙은 채로 떨렸다.
“하 어르신.”
“아니야.”
노인은 갑자기 종이를 접으려 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아 모서리가 구겨졌다. 진소백은 반사적으로 종이를 받쳐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하나가 많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모른다.”
“세고 계셨잖습니까.”
“세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진소백은 알았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밀어붙이면 노인이 부서질 것 같았다. 하 노인의 눈은 명단을 보지 않고 문을 보고 있었다. 낮에도 닫힌 문이었다. 빗장까지 걸린 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마치 방금 그 말을 누군가 밖에서 들었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이건 어디서 났느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하지 마라. 아니, 말해도 안 된다.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마라.”
하 노인이 종이를 진소백 쪽으로 밀어냈다. 마른 손등에 힘줄이 툭툭 섰다.
“치워라.”
“하 어르신.”
“치우라고 했다.”
진소백은 명단을 접었다. 접힌 선이 이미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종이를 품 안에 넣는 동안 하 노인의 시선은 그 움직임을 끝까지 따라왔다. 빼앗기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눈이기도 했고, 그 종이가 아직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하는 눈이기도 했다.
“잘 감춰라.”
“감추고 있습니다.”
“그런 걸 감춘다고 말하면 못 감춘 것이다. 네 몸에 붙여라. 자다가도 손에 닿는 곳에 둬라. 물에 젖지 않게 하고, 불 가까이 두지 말고, 남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마라.”
“하 어르신께는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래 못 살지도 모르지.”
그 말은 농담처럼 나오지 않았다. 진소백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누가 옵니까?”
하 노인이 입을 다물었다.
“밤에 누가 오는 겁니까?”
노인의 목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방이 조용했다.
“밤에는 다 온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물이 오고, 바람이 오고, 술 취한 놈이 오고, 죽은 놈도 온다.”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하 노인은 진소백을 보았다. 그 눈에는 짜증보다 겁이 먼저 있었다. 겁이 너무 많아 짜증으로 가리지도 못했다.
“밤에 발소리가 나면 문을 열지 마라.”
“하 어르신도 열지 마십시오.”
“나는……”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진소백은 그가 어떤 이름을 삼켰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더 답답했다.
“오늘 밤엔 제가 여기 있겠습니다.”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네가 있으면 더 온다.”
“누가요.”
“묻지 마라.”
“묻지 않으면 어떻게 지킵니까.”
하 노인은 갑자기 화를 냈다. 손에 잡힌 사기잔을 바닥에 내려치듯 놓았다. 물이 튀었다.
“지키지 마라! 너 같은 애가 뭘 지킨다고 설치느냐. 네 몸이나 챙겨라. 돌아가라. 해 지기 전에 돌아가.”
진소백의 속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너 같은 애. 그 말은 낯설지 않았다. 그는 한때 정말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아이였다. 이제는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노인의 말 한마디가 지난 시간을 밀어젖혔다.
“약은 두 번 드십시오. 저녁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두고 가라.”
“제가 달여 드리겠습니다.”
“약방 가서 지어 와라. 여기 있지 말고.”
“지금 있는 것으로도 됩니다.”
“새로 지어 와라.”
핑계라는 것을 알았다. 하 노인은 진소백을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쫓아내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떠밀어 살리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진소백은 그 구분을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았다.
그는 약낭을 다시 묶었다. 보따리 안쪽을 확인했다. 편지, 부러진 검, 백옥 비녀. 명단은 품속에 있었다.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확인했다.
“저녁 약을 지어 오겠습니다.”
“오지 마라.”
“약만 문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오지 말라니까.”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으로 다가가 빗장을 풀었다. 밖의 햇빛이 좁은 틈으로 들어왔다. 나가기 직전, 하 노인이 뒤에서 말했다.
“소백아.”
그가 돌아보았다.
하 노인은 마치 처음 부른 사람처럼 이름을 어색하게 입에 올린 얼굴이었다.
“그 종이…… 네가 들고 있어라.”
“예.”
“누가 달라 해도 주지 마라.”
“예.”
“네가 믿는 사람이라도.”
진소백은 순간 스승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죽은 사람도 믿는 사람에 들어가는지, 산 사람만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낮의 골목은 별일 없다는 듯 젖은 냄새를 풍겼다. 진소백은 약방 쪽으로 걸었다.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하나가 많아.
말은 뒤따라왔다. 물길 위에 떠 있는 나뭇조각처럼, 아무리 밀어도 다시 발끝에 닿았다.
약방에는 손님이 둘 있었다. 진소백은 말없이 뒤편으로 들어가 약재를 골랐다. 지혈과 진통에 쓸 것, 열을 내릴 것, 심신을 조금 가라앉힐 것. 늙은 사람에게 세게 쓰면 안 되는 약재를 덜어냈다. 손은 일을 했지만 마음은 하 노인의 문 앞에 남아 있었다.
약방 주인이 뭐라 물었으나 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릇에 약재를 담고, 물을 붓고, 불을 보았다. 물이 끓기까지 시간이 길었다. 끓고 나서는 더 길었다. 그는 자꾸 문밖을 보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객잔에 들러 보따리를 놓고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보따리는 어깨에 있었다. 품속의 명단은 몸에 닿아 따뜻해져 있었다. 하 노인의 말대로 자다가도 손에 닿는 곳이었다. 그 사실이 위안이 되지 않았다.
저녁 무렵 그는 약을 들고 하 노인의 집까지 갔다. 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하 어르신.”
안에서 기척이 없었다.
“약 두고 갑니다.”
그는 문턱 옆에 약그릇을 놓았다.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다. 하 노인이 오지 말라 했다. 여기에 있으면 더 온다 했다. 그 말의 뜻을 믿지는 않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결국 한 번만 문을 두드렸다.
“약입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안쪽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났다. 발소리인지, 헛기침인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붙잡고 싶은 소리였다. 진소백은 더 서 있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객잔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강가의 냄새가 다시 짙어졌다. 저녁 장사를 끝낸 상인들이 천막을 접고, 술집 쪽에서는 거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소백은 객잔 방에 올라가 보따리를 내려놓았다가, 곧 다시 끌어안았다. 놓아도 되는 것과 놓으면 안 되는 것이 뒤섞였다.
밥은 거의 넘기지 못했다. 숟가락을 들고 있다가 식은 국물 위에 기름이 굳는 것만 보았다. 객잔 주모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약방에서 온 몸에는 늘 약 냄새가 배어 있어, 아픈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밤이 깊어졌다.
그는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물소리가 들렸다. 널판 밟는 소리도 들렸다. 골목의 소리들은 밤마다 사람의 걸음처럼 변했다가, 가까이 오면 물소리로 풀어졌다. 진소백은 몇 번이나 일어나 앉았다. 품속의 명단을 만졌다. 보따리 안의 부러진 검은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싸우는 물건이 아니라 남겨진 물건이었다. 오늘 밤 그가 가진 것은 약낭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비명이 들렸다.
여자의 비명인지 남자의 외침인지 처음에는 구분되지 않았다. 짧고 찢어진 소리였다. 이어서 누군가가 골목에서 다급히 외쳤다.
“하 영감 집! 누가 좀 와 봐!”
진소백은 일어섰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약낭을 움켜쥐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객잔 주모가 뒤에서 뭐라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자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골목은 젖어 있었다. 낮에 말랐던 널판들이 다시 물기를 먹고 미끄러웠다. 진소백은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하 노인의 집 쪽으로 달리며 숨이 목에 걸렸다. 물길 너머에서 등불 하나가 흔들렸다. 누군가 문 앞에 서 있다가 그를 보고 비켜섰다.
그 순간, 집 옆 좁은 골목 끝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검은 옷도 아니었다. 밤이라 어두워 보였을 뿐, 옷자락의 색은 등불 아래에서 흐릿하게 뒤섞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물길 쪽으로 달렸다. 달린다기보다 쫓겨 넘어지지 않으려 발을 내딛는 모양이었다. 젖은 판자에 발이 미끄러져 한쪽 무릎이 꺾였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다시 일어나려다 어깨가 담벼락에 부딪혔다.
진소백은 본능적으로 쫓았다.
“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림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물길 옆 낮은 담에 매달렸다. 한 번에 넘지 못하고 발을 버둥댔다. 담 위에 배를 걸치듯 올라갔다가 반대편으로 굴러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공을 익힌 몸놀림이라면 저럴 수 없었다. 그러나 진소백은 그 생각을 끝까지 붙잡지 못했다. 하 노인의 집 안쪽에서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담 쪽으로 두 걸음 더 갔다가 멈췄다.
쫓아야 했다. 잡아야 했다. 그래야 무엇이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 노인이 있었다. 낮에 상처를 맡기던 마른 팔이, 종이를 밀어내던 떨리는 손이, 밤에는 문을 열지 말라던 목소리가 뒤에서 피 냄새가 되어 그를 잡았다.
진소백은 돌아섰다.
하 노인의 문은 부서져 있지 않았다. 빗장이 박살 난 흔적도, 문짝이 뜯긴 흔적도 없었다. 그저 안쪽으로 조금 밀려 있었다. 누군가 급히 닫다 만 것처럼, 혹은 열어 준 뒤 다시 닫을 겨를이 없었던 것처럼. 문턱 옆에는 저녁에 두고 간 약그릇이 넘어져 있었다. 약은 절반쯤 흘러 검은 물처럼 번졌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피 냄새가 먼저 왔다.
하 노인은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몸이 문 쪽을 향해 비스듬히 꺾여 있었다. 흰 머리칼에 피가 엉겨 붙었고, 이마 옆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가를 지나 귀 밑으로 고였다. 진소백은 무릎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하 어르신!”
노인의 눈은 감겨 있었다. 숨이 아주 가늘었다. 살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진소백을 찢어지지 않게 붙들었다.
그는 약낭을 열었다. 손이 떨려 끈이 한 번에 풀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잡아당겼다. 상처를 보았다. 날붙이가 정확히 찌른 자국이 아니었다. 베인 것도 아니었다. 둔한 무엇인가가 급히 내려친 듯 살이 찢기고 눌려 있었다. 피는 많이 났지만 상처의 모양은 깨끗하지 않았다. 방 한쪽에 넘어진 물항아리 받침이 눈에 들어왔다. 모서리에 피가 묻어 있는지 아닌지 등불이 흔들려 확실치 않았다. 그는 그것을 더 보지 않았다. 지금 볼 것은 피가 어디서 나오는지였다.
“천! 깨끗한 천 가져오십시오!”
문간에 서 있던 이웃이 굳어 있었다. 진소백이 다시 외쳤다.
“천 가져오세요! 물도요. 뜨겁게 데울 수 있으면 데워 오시고, 사람 더 부르십시오!”
그제야 사람이 움직였다. 발소리가 흩어졌다. 누군가 울면서 이름을 불렀다. 진소백은 천을 접어 상처 위에 눌렀다. 피가 손바닥 아래에서 따뜻하게 번졌다. 너무 세게 누르면 안 된다. 그러나 약하게 누르면 멈추지 않는다. 그는 손끝의 감각에 매달렸다. 스승님이 가르쳐 준 손의 무게를 떠올렸다. 누르는 손, 살리는 손, 놓치지 않는 손.
“하 어르신, 들리십니까.”
노인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말하지 마십시오. 숨만 쉬십시오.”
진소백은 약초 가루를 꺼냈다. 피를 멎게 하는 것과 통증을 낮추는 것을 구분했다. 머리 상처에 함부로 넣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손이 떨리는 것을 멈추려 손목을 무릎에 눌렀다.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작아졌다.
이웃 여자가 천을 가져왔다. 누군가 물동이를 들고 왔다. 또 다른 사람이 의원을 부르겠다며 뛰어나갔다. 진소백은 고개도 들지 않고 지시했다.
“등불 가까이. 아니, 너무 가까이는 말고요. 그림자 지지 않게.”
“살 수 있나?”
누가 물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살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될 수 있었고, 죽는다는 말은 지금 이 방에서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는 지혈천을 갈았다. 첫 천은 이미 붉게 젖어 무거웠다. 두 번째 천을 올리고, 노인의 턱을 조금 옆으로 돌려 숨길을 열었다.
하 노인의 숨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가끔 목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진소백은 그때마다 몸을 기울여 살폈다. 피가 목으로 넘어가면 안 되었다. 노인의 손이 바닥을 긁듯 움직였다. 진소백은 피 묻은 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여기 있습니다.”
노인의 손가락이 그의 손바닥을 아주 약하게 쥐었다. 붙잡았다기보다, 있는지 확인한 것 같았다. 낮의 말이 다시 들렸다. 그 종이 네가 들고 있어라. 누가 달라 해도 주지 마라. 네가 믿는 사람이라도.
진소백은 품속의 명단을 느꼈다. 아직 있었다. 젖지 않았다. 빼앗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잃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무림인 짓이라 했고, 누군가는 낮에 낯선 사내를 보았다고 했다. 곽서의 얼굴이 진소백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손목쯤 되는 자. 질서를 말하던 입. 그런 자들이라면 사람 하나를 이리 만들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쉬웠다. 외지의 무서운 자들이 한 짓이라고 믿으면, 이 방 안의 문이 부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도망치던 등이 서툴렀다는 것도, 젖은 판자에서 미끄러지던 발도, 담을 겨우 넘던 몸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잊히지 않았다.
진소백은 이를 악물고 다시 상처를 눌렀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생각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손만이, 약만이, 숨을 붙잡는 작은 요령만이 지금 필요한 것이었다.
“하 어르신. 숨 쉬십시오.”
노인의 눈꺼풀이 떨렸다. 뜨지는 않았다.
“제가 있습니다.”
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낮에는 여기 있지 말라는 말을 듣고 물러났다. 저녁에는 문 앞에 약을 두고 돌아섰다. 밤에는 비명을 듣고서야 달려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너무 늦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었지만, 이미 늦은 것은 분명히 있었다.
의원이 도착했을 때 진소백의 손은 피로 굳어 있었다. 늙은 의원은 상처를 보고 얼굴을 굳혔으나, 진소백이 해 둔 지혈을 풀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자리를 나누었다. 진소백은 물을 받고, 천을 갈고, 약을 건넸다. 누군가 하 노인을 옮기자고 했지만 의원이 꾸짖었다. 움직이면 더 위험했다.
밤은 길어졌다. 방 안의 등불은 여러 번 흔들렸고, 심지는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차츰 낮아졌다. 남은 것은 숨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피가 천에 스미는 둔한 시간뿐이었다.
하 노인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다고 말하기에도 너무 먼 곳에 누워 있었다. 숨은 있었고, 맥은 손끝에서 희미하게 잡혔다. 그 희미함이 진소백의 온몸을 붙들었다. 그는 손을 떼지 못했다. 의원이 이제 조금 물러나 있으라 했을 때도, 그는 방 한쪽에 앉아 노인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만 보았다.
문은 여전히 부서져 있지 않았다. 안쪽으로 조금 밀려 있을 뿐이었다.
진소백은 그 문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도망치던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미끄러지던 발. 담에 걸리던 몸. 얼굴 없는 사람. 낯익은지 낯선지조차 알 수 없는 밤의 등.
그는 곽서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정하면 분노는 한 방향으로 뻗을 수 있었다. 강호의 어딘가, 손목이라 불리는 자들의 어딘가를 향해 마음속으로라도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방바닥의 피는 그런 생각보다 가까웠다. 하 노인의 손은 낮에 그의 손 아래에서 떨렸고, 밤에는 피 속에서 식어 갔다.
진소백은 품속을 눌렀다. 명단은 거기 있었다. 스승님의 편지도, 부러진 검도, 백옥 비녀도 보따리 안에 남아 있었다. 종이도 빼앗기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지켜야 한다고 들은 물건들은 아직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런데도 가슴 안쪽이 텅 비었다.
지키지 못한 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하 노인이었다.
자기 집에 숨어 살던 겁 많은 늙은 사공. 문틈으로 먼저 눈을 내밀던 사람. 상처를 봐 달라면서도 괜찮다고 우기던 사람. 죽은 사람 이름은 말하지 말라던 사람. 낮은 목소리로,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떨어뜨린 사람.
하나가…… 많아.
그 말만 남았다. 뜻은 없었다. 뜻이 없는데도 무게는 있었다. 피 냄새보다 오래 남고, 물소리보다 낮게 깔렸다. 진소백은 하 노인의 희미한 숨을 세며 그 말을 함께 세었다. 하나, 둘, 셋. 어디서부터 무엇이 많아졌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또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설명되지 않은 한마디가 피 묻은 방 한가운데에 오래도록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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