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끝
진소백은 문을 걸어 잠근 뒤에도 한참 동안 손을 떼지 않았다.
낡은 문짝 너머로 소리가 지나다녔다. 마루를 밟는 발, 아래층에서 그릇을 포개는 소리, 누군가 술기운에 웃다가 사레드는 소리. 방 안에는 등불 하나가 남아 있었다. 심지를 너무 길게 올렸는지 불꽃 끝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는 침상가에 앉아 나무함을 무릎 위에 올렸다.
함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의원집 약장 아래에 있던 물건치고는 손때가 많았다. 그는 함을 열기 전 잠시 숨을 고르고, 손가락으로 잠금쇠를 눌렀다. 쇠가 작은 소리를 냈다.
편지들이 차례로 드러났다.
이미 여러 번 읽은 것이었다. 도망치듯 마을을 떠난 뒤에도, 객점에 숨어들었을 때도, 길가에서 비를 피할 때도 그는 종종 꺼내 읽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글자는 멀어졌다. 한 번은 스승의 목소리처럼 들리다가, 다음번에는 전혀 모르는 사내의 흔적처럼 낯설었다.
진소백은 가장 위에 놓인 종이를 폈다.
종이는 얇고 오래되어 접힌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고진명의 글씨는 반듯했다. 의원으로 처방을 적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처방전에서는 항상 약재 이름과 양이 딱딱 끊겼는데, 이 편지에서는 몇 군데 획이 길게 미끄러져 있었다. 급히 쓴 듯하면서도 일부러 눌러 삼킨 자리가 있었다.
그는 낮은 소리로 읽었다.
“……내가 네게 남긴 말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란다.”
읽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옆방에서 새어 나오던 자기 이름이 아직 귀에 걸려 있었다. 진소백.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길 위에서, 객점에서, 모르는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면 칼집 없는 칼날처럼 다가왔다.
그는 다음 장을 펼쳤다.
첫 장은 자신에게 남긴 말이었다. 둘째 장은 더 흐릿했다. 받는 사람이 적혀 있지 않았다. 한쪽 귀퉁이가 물에 젖었다 마른 듯 번져 있었다.
‘오래된 벗에게.’
진소백은 그 대목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전에도 본 글자였다. 그때는 그저 오래된 편지의 첫머리라 여겼다. 스승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고, 누군가와 술을 마셨을 테고, 빚도 졌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정도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옆방의 낮은 말들, 명단에 남은 이름들, 자신을 알아보거나 모르는 척 지나가는 눈길들이 그 짧은 문장을 다르게 보이게 만들었다.
오래된 벗.
고진명에게 그런 말을 받을 사람이 있었다.
진소백은 장을 더 내려 읽었다. 몇 줄은 찢겨 있었다. 어떤 글자는 번져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등불을 가까이 당겼다. 불빛이 종이를 노랗게 물들였다.
‘……낙양에서의 일은……’
거기서 글자는 끊겼다.
그 뒤는 얼룩이었다. 말린 먹인지, 물인지, 오래 묵은 손때인지 알 수 없었다. 진소백은 종이를 기울여 보았다. 획 하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한 획만으로는 아무 말도 되지 않았다.
낙양.
그는 지명을 입안에서 굴려 보지 않았다. 소리 내면 방 안 어딘가에 숨어 있던 것이 깨어날 것 같았다. 대신 눈으로만 다시 읽었다.
낙양에서의 일은.
그 다음에 무엇이 이어졌을까. 미안하다는 말이었을까. 끝났다는 말이었을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었을까.
진소백은 종이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스승은 마을에서 시골 의원이었다. 약초를 말리고, 아이의 열을 재고, 장정의 삔 발목을 잡아 맞추고, 죽어 가는 노인 곁에서 밤을 새던 사람이었다. 손님이 돈을 내지 못하면 말없이 약봉지를 하나 더 얹어 주었다. 술에 취한 촌장이 큰소리쳐도 웃으며 넘겼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진소백에게 장작이 젖지 않게 들여놓으라 했고, 겨울이면 손이 갈라지지 않게 돼지기름을 바르라 했다.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전부라 믿어야 편했다.
그는 셋째 장을 펼쳤다. 이 장은 스승이 자신에게 쓰다 만 듯한 글이었다. 문장 사이가 넓었다. 오래 생각하다 적은 흔적처럼 먹의 농도가 들쭉날쭉했다.
‘소백아,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에는 내가 곁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해라. 모르는 이름을 함부로 믿지 말고, 아는 이름을 함부로 버리지 마라.’
진소백의 시선이 멎었다.
아는 이름.
그는 품속 안쪽에 넣어 둔 작은 꾸러미를 꺼내지 않았다. 그 안의 것들은 종이보다 무거웠다. 이름들이었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이름들. 더 이상 묻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이름들과,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름들.
문득 마루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진소백은 편지를 접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가 문틈 아래로 지나가다 멈췄다. 손이 저도 모르게 곁의 봇짐으로 가려는 찰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자지 않았소?”
유란이었다.
진소백은 손을 멈췄다. 긴장이 늦게 풀리며 어깨가 내려갔다.
“아직.”
“불빛이 문틈으로 샙니다. 누가 보면 밤새 글공부라도 하는 줄 알겠소.”
“그렇게 보이면 낫지.”
잠시 말이 없었다. 유란은 문밖에 그대로 서 있는 듯했다. 진소백은 편지를 접으려다가,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펼쳐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고리를 풀고 문을 조금 열었다.
유란은 등불 없는 복도에 기대 서 있었다. 머리는 대충 묶었고, 겉옷은 어깨에 걸친 채였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술 냄새가 그녀 뒤로 희미하게 엉겨 있었다.
그녀의 눈이 방 안을 스쳤다. 나무함, 펼쳐진 편지, 진소백의 손끝.
“깨웠소?”
“아니.”
“그럼 내가 방해했군.”
“방해는 아니다.”
유란은 들어오겠다고 하지 않았다. 진소백도 비켜서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문짝 하나가 반쯤 끼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아까 옆방 말이 마음에 걸렸소?”
진소백은 대답 대신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이 걸리는 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새삼스럽지 않은 것과 무뎌지는 건 다르오.”
그는 그녀를 보았다. 유란은 더 묻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스승이 남긴 편지다.”
“고 의원?”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장이 있었는데,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못 본 게 있다.”
“못 본 글자?”
“못 보려 한 글자일지도.”
유란의 시선이 편지 쪽으로 다시 갔다. 그녀는 문턱을 넘지 않은 채 몸을 조금 기울였다. 등불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가 흔들렸다.
“읽어도 되오?”
진소백은 망설였다. 스승의 편지를 남에게 보이는 일은 약함을 드러내는 일 같았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나 있었다. 피 묻은 길, 쫓기는 이름, 의심하는 눈. 숨긴다고 작아지지 않았다.
그는 편지 한 장을 집어 문가로 가져갔다.
“전부는 아니다. 여기.”
유란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가까이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글자를 따라가던 그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진소백은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지?”
“무엇이 말이오?”
“방금.”
유란은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글씨가 낯익어 보였소.”
진소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래된 종이가 미세하게 휘었다.
“스승의 글씨가?”
“아니. 전부가 아니라…… 이 끝맺음.”
그녀가 손가락을 들었다가 종이에 닿기 전 멈췄다. 예의인지, 조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이름도 서명도 아닌 마지막 획이었다. 한 문장의 끝에서 붓이 살짝 꺾이며 빠져나간 자국.
“누구 글씨지?”
“그렇게 묻는다고 바로 답이 나올 만큼 분명하진 않소.”
“하지만 아는 눈치였다.”
유란은 그를 보았다. 복도의 어둠 속에서 그녀의 표정은 반쯤만 보였다.
“낯익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다르오.”
“그 차이를 지금 따져야 하나?”
“따져야 하오. 길 위에서는 그 차이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니까.”
진소백은 말을 삼켰다. 맞는 말이라 더 세게 물을 수 없었다. 유란은 다시 편지로 눈을 돌렸다.
“장터에 오래된 서간을 판별하는 자가 있소. 글씨를 맞히는 일을 업으로 삼는 건 아니고, 남의 문서를 대신 써 주며 밥을 먹는 늙은 서리라 들었소. 내가 아는 것은 그 정도요.”
“이 객점 근처에?”
“아침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거요. 낮에는 술집 뒤편에서 장부를 봐 준다더군.”
“그자를 어떻게 알지?”
유란은 이번에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여인이 웃는 소리가 올라왔다. 웃음이 끊기자 빈 잔을 놓는 소리가 뒤따랐다.
“길을 걷다 보면, 글씨를 파는 자와 말을 파는 자와 침묵을 파는 자가 보이오.”
“그건 대답이 아니다.”
“대답이 될 만큼만 말한 거요.”
진소백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편지를 거두었다.
유란은 한 걸음 물러났다.
“밤에는 더 읽지 마시오. 같은 글자를 오래 보면 없는 글자까지 보이오.”
“없는 글자가 아니라 빠진 글자를 찾는 중이다.”
“빠진 글자는 사람을 끌고 다니오.”
“이미 끌려가고 있다.”
그 말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유란은 그를 보았지만, 위로하지 않았다. 위로는 이 방에 맞지 않았다.
“그럼 아침에 나가시오. 끌려가더라도 눈 뜨고 가는 편이 낫소.”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란.”
그녀가 돌아서려다 멈췄다.
“왜 말해 주는 거지?”
유란은 잠시 그를 보았다.
“편지를 쥔 손이 자꾸 빈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소. 잡을 것도 없으면서.”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자기 방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는 길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진소백은 방 안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잠그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다시 접었다. 접힌 자리를 따라 손끝이 지나갔다. 없는 글자까지 보지 말라는 말이 귓속에 남았다. 그러나 글자는 이미 보였다. 오래된 벗. 낙양. 아는 이름을 버리지 말라는 당부. 그리고 알아보는 듯했던 유란의 눈.
그는 나무함을 닫고 옷을 입은 채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아래층의 소란이 잦아든 뒤에도 눈꺼풀 안쪽에 먹빛 획들이 떠다녔다. 어느 순간 창밖에서 첫 수레바퀴 소리가 지나갔다.
아침은 흐렸다.
저잣거리는 밤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 냄새 대신 젖은 볏짚 냄새가 깔렸고, 생선 좌판에서는 비늘을 긁는 칼날 소리가 났다. 객점 앞에는 장사꾼들이 천막을 펴며 서로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말은 거칠었지만 손은 익숙했다. 한쪽에서는 만두 찜통의 김이 피어올랐다.
진소백은 유란과 나란히 걷지 않았다. 반 걸음쯤 거리를 두었다. 둘이 함께 보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기억할 수 있었다. 유란도 그 간격을 줄이지 않았다.
“어디쯤이라고 했지?”
“술집 뒤편. 붉은 술독이 세 개 놓인 집.”
“이른 아침부터 술집인가.”
“술집은 밤에만 돈을 벌지 않소. 낮에는 빚이 오가고, 장부가 오가오.”
유란의 말대로 붉은 술독은 쉽게 보였다. 벽에는 낡은 종이가 덧붙어 있었다. 술값을 외상으로 달지 말라는 글이 여러 번 고쳐 쓰여 있었고, 그 아래에 누군가 장난으로 작은 얼굴을 그려 놓았다.
술집 뒤편 골목에는 볕이 잘 들지 않았다. 물이 고인 곳을 피해 들어가자, 좁은 처마 아래에 작은 상이 놓여 있었다. 상 위에는 붓 여러 자루와 먹, 반쯤 마른 종이, 끈으로 묶은 장부가 쌓여 있었다. 그 앞에 앉은 노인은 한 손으로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노인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외상 장부면 안쪽으로 가시오. 탄원서면 세 문장에 두 냥. 화해문은 사정 듣고 값이 달라.”
진소백은 편지를 꺼내지 않았다.
“글씨를 보러 왔소.”
주판알 소리가 멈췄다.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흐렸지만, 사람을 훑는 방식은 흐리지 않았다. 먼저 진소백의 손, 허리, 신발 끝을 보았다. 그다음 유란을 보았다.
“글씨는 누구나 보지. 읽을 줄 몰라도 모양은 보이니.”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묻는 거요.”
노인은 주판을 옆으로 밀었다.
“이름부터 대시오.”
진소백은 잠시 침묵했다.
유란이 옆에서 말했다.
“이름을 먼저 팔 사람은 아니오.”
노인은 그녀를 다시 보았다.
“아가씨는 말값부터 치를 줄 아는구려.”
“말값은 나중에 받을 수도 있지 않소?”
“그럼 나중에 도망도 가지.”
“도망갈 사람은 골목 안으로 들어오지 않소.”
노인은 콧소리를 냈다. 웃음인지 기침인지 애매했다.
“종이를 놓고 가시오. 내가 봐 두지.”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봐야 하오.”
“그럼 값이 오른다.”
“얼마.”
노인은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은자 두 냥.”
“글자 몇 줄 보는 값치고 비싸군.”
“글자 몇 줄 때문에 칼 맞는 값까지 들어갔소.”
진소백은 노인을 가만히 보았다. 노인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서 지나가던 아이가 물동이를 들고 뛰어가다 이쪽을 힐끗 보았다.
유란이 조용히 말했다.
“한 냥. 맞히면 나머지.”
노인은 혀를 찼다.
“요즘 젊은 것들은 흥정부터 배워.”
“늙은 사람들은 겁부터 팔고요.”
이번에는 노인이 분명히 웃었다. 진소백은 품에서 작은 은 조각을 꺼내 상 위에 놓았다. 노인은 손톱으로 밀어 무게를 확인한 뒤 고개를 까딱였다.
진소백은 편지 한 장을 폈다. 오래된 벗이라는 말이 있는 장이었다. 낙양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부분은 손가락으로 가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노인은 몸을 가까이 숙였다. 붓을 잡던 손이 종이 위를 맴돌았다. 닿지는 않았다. 그의 눈이 획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줄에서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 올라왔다.
진소백은 그 변화를 보았다.
“아는 글씨요?”
노인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편지를 조금 더 보려는 듯 목을 빼다가, 진소백이 종이를 거두려 하자 손을 멈췄다.
“이 글은 누가 썼소?”
“내가 묻고 있소.”
“묻는 사람이 먼저 숨기면, 답하는 사람도 숨기는 법이오.”
진소백은 종이를 접지 않았다.
“이 글씨를 본 적이 있소?”
노인은 주판알 하나를 밀었다. 딸깍, 소리가 작게 울렸다.
“비슷한 글씨를 본 적은 있소.”
“어디서.”
“오래전 문서에서.”
“무슨 문서.”
노인의 입꼬리가 굳었다.
“거기까지는 두 냥으로 안 되오.”
진소백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는 상 위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값을 올리려는 거라면 잘못 골랐소.”
노인은 진소백의 손을 보았다. 칼을 쥔 손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오래 눌러 온 손, 약을 다루던 손에 가까웠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낮췄다.
“젊은이, 어떤 글씨는 돈보다 사람을 부르오. 내가 지금 모른다고 하면 그대는 다른 곳에 가 묻겠지. 안다고 하면 내 이름이 그 글씨 곁에 붙을 것이오. 둘 다 달갑지 않아.”
유란이 말했다.
“그럼 달갑지 않은 쪽 중 덜 나쁜 것을 고르시오.”
노인은 그녀를 흘겨보다가 다시 편지를 보았다.
“이 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거요.”
진소백은 숨을 멈췄다.
“누구.”
“나는 그 사람 이름을 말하지 않았소.”
“지금 말하면 되오.”
“못 말하는 게 아니라 안 말하는 거요. 아직.”
진소백은 상 위에 손을 올렸다. 나무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장난하지 마시오.”
노인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장난이면 더 쉬웠겠지. 붓글씨에는 버릇이 남소. 특히 끝을 접는 방식은 잘 안 고쳐져. 이 글은 의원이 약방문 쓰듯 쓴 글이 아니오. 숨기려 했지만 배운 손이오. 누군가에게 배웠거나, 누군가와 오래 같은 문서를 만진 손.”
고진명.
진소백은 머릿속에서 스승의 손을 떠올렸다. 약초를 다듬던 손. 침을 놓기 전 맥을 짚던 손. 겨울밤 화로 앞에서 글을 쓰던 손. 그 손이 누군가와 같은 문서를 만졌다는 말은 잘 붙지 않았다. 그러나 편지의 획은 붙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것은, 이 글씨를 알아볼 눈이 아직 이 고을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뿐이오.”
“이 고을에?”
“오늘은 장날이오. 먼 곳의 장부도 들어오고, 오래된 장사치도 들어오지. 묻고 다니면 누군가는 고개를 돌릴 거요. 다만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대답하는 사람은 아닐 수도 있소.”
“헛소리로 시간을 끄는군.”
“살아남으려면 헛소리와 경고를 구분해야 하오.”
노인은 상 위의 은 조각을 손가락으로 밀어 돌려주었다. 진소백은 그것을 보았다.
“값은?”
“안 받겠소.”
“왜.”
“값을 받으면 거래가 되오. 거래가 되면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면 언젠가 말하게 되지.”
노인은 편지에서 눈을 떼고 붓을 집었다. 장부를 펼치며 방금 일은 없었다는 듯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그 종이는 남에게 오래 펴 보이지 마시오. 특히 이름을 묻는 입 앞에서는.”
진소백은 편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내 이름을 묻는 입을 말하는 거요?”
노인은 붓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는 이름을 묻는 자가 많소. 빚쟁이, 관아, 잃어버린 자를 찾는 가족, 그리고…… 남의 이름으로 문을 여는 자들.”
마지막 말은 장부의 숫자 사이에 묻혔다. 진소백은 더 묻지 않았다. 노인은 더 답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골목을 나와 저잣거리로 돌아오자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흥정, 욕설, 웃음, 바퀴, 짐승의 울음. 진소백은 사람들 틈에서 잠시 멈춰 섰다. 유란도 곁에 섰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아까와 같았다.
“저 노인 말을 믿소?” 유란이 물었다.
“전부는 아니고.”
“무엇을 믿소?”
“겁먹었다는 것.”
유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소백은 품속의 편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얇은 종이인데도 옷감 너머로 모서리가 느껴졌다. 그 아래에는 다른 꾸러미가 있었다. 이름들이 적힌 것. 꺼내지 않아도 위치를 알았다.
스승의 과거.
명단의 이름들.
자기 이름을 찾는 자들.
셋은 따로 움직이는 줄 알았다. 하나는 죽은 스승의 남은 말, 하나는 자신을 끌고 온 종이, 하나는 길 위의 위험. 그러나 오늘 아침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그것들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발자국처럼 보였다. 어느 발자국이 먼저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도 몰랐다.
그는 문득 피곤함을 느꼈다. 잠을 자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알던 세계가 작아지고 있었다. 시골 의원의 집, 약장, 마당의 우물, 스승의 잔소리. 그 안에 다 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방금 한 줄의 글씨 때문에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갔다.
오래된 벗.
낙양.
글씨를 알아볼 자.
진소백은 고개를 들어 거리 끝을 보았다. 그곳에는 성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아침 장을 보러 온 사람들과 짐꾼들이 섞여 천천히 흘렀다. 더 멀리, 관문으로 가는 길목에는 먼지가 엷게 일고 있었다.
“개방 쪽 실마리,” 그가 말했다.
유란이 그를 보았다.
“노칠?”
“이름으로만 떠도는 자를 찾아가야겠지. 그자가 무엇을 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는 것들이 서로 같은 쪽을 보고 있다.”
“같은 쪽?”
“내 스승이 숨긴 것. 명단에 남은 이름들. 그리고 내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들.”
그는 말을 끊었다. 지나가던 장정 둘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채소 수레를 피해 돌아갔다. 진소백은 그들이 완전히 지나간 뒤에야 다시 말했다.
“하나씩 따로 피하면 계속 쫓기기만 할 거다.”
“함께 좇겠다는 말이오?”
“그래.”
말을 하고 나니 입안이 말랐다. 그러나 그 말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진소백은 자신이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사실보다, 그 결심이 이미 오래전부터 안쪽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더 또렷하게 느꼈다. 스승의 죽음 이후 그는 계속 도망쳤다. 도망치며 묻고, 묻다가 또 도망쳤다. 이제는 묻기 위해 걸어야 했다.
유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저잣거리 건너편을 턱짓했다.
“그럼 오늘 떠나는 게 낫소. 이름이 한 번 새면 같은 객점에서 두 밤은 길어.”
“준비할 게 있나?”
“물. 마른 음식. 그리고 편지는 품 안쪽 깊이 넣으시오. 손이 자주 가면 남들도 본다.”
진소백은 품을 여몄다.
“유란은?”
그녀는 잠시 그를 보았다.
“나는 내 짐이 가볍소.”
“같이 간다는 뜻인가?”
“혼자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소.”
“묻는 말에 답을 잘 안 하는군.”
“그대도 이름을 다 말하지 않잖소.”
진소백은 헛웃음을 삼켰다. 웃음으로 나오기에는 길 위가 너무 가까웠다.
그들은 객점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진소백의 짐은 많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 한 벌, 약재 몇 가지, 천에 싼 부러진 검, 나무함. 그는 편지들을 다시 함에 넣으려다 멈췄다. 오래된 벗이 적힌 장과 스승이 자신에게 남긴 장만 따로 접어 품속 깊은 곳에 넣었다. 나머지는 함에 넣고 천으로 감쌌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주인은 졸린 얼굴로 계산을 했다. 진소백은 동전을 놓았다. 주인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오래 머물지 않기를 바랐고, 다행히 주인은 돈을 세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달라져 있었다. 장터의 소리가 등 뒤에서 점점 멀어졌다. 길목에는 관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짐을 실은 수레, 보따리를 멘 노파, 말고삐를 잡은 젊은 사내, 팔짱을 끼고 주변을 살피는 사람들. 관문 위 깃발은 느리게 흔들렸다.
진소백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객점의 창, 어젯밤 불빛, 옆방에서 새던 자기 이름.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거기에 답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관문에 가까워질수록 먼지가 신발 끝에 묻었다. 관리가 사람들을 훑어보며 통행패를 확인했다. 누군가는 웃으며 지나갔고, 누군가는 짐을 풀어 보여 주었다. 진소백 차례가 왔을 때, 그는 고개를 숙이지도 들이대지도 않았다. 평범한 얼굴로, 평범한 숨으로 서 있었다.
“이름.”
관리의 말이 짧았다.
진소백은 아주 짧은 순간 멈췄다.
그 순간 품속의 편지가 살에 닿아 있었다. 스승의 글씨가 있었다. 명단의 이름들이 있었다. 길 위 어딘가에서 자기 이름을 찾는 입들이 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진소백.”
관리는 통행패를 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가.”
너무 쉽게 열린 문이었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진소백은 관문을 지나갔다. 등 뒤에서 같은 질문이 다른 사람에게 던져졌다. 이름. 또 다른 이름.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이름을 내고 문을 통과했다.
문 너머 길은 넓었다가 곧 둘로 갈라졌다. 한쪽은 강을 따라 낮게 뻗었고, 다른 쪽은 언덕을 넘어 먼 마을로 이어졌다. 길가 말뚝에는 오래된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몇몇 지명은 덧칠되어 알아보기 어려웠다.
유란이 옆으로 다가왔다.
“어느 쪽이오?”
진소백은 말뚝의 글자를 보았다. 개방 노칠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스승의 오래된 벗도, 낙양이라는 희미한 글자도, 글씨를 알아볼 자도 길 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왼쪽 길을 가리켰다.
“먼저 사람 많은 곳으로 간다. 이름은 사람들 입에 남으니까.”
“그리고?”
진소백은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엔, 스승이 무엇을 좇았는지 묻는다.”
바람이 관문 안쪽의 장터 소리를 잘라냈다. 앞에는 아직 모르는 길만 남았다. 진소백은 품속의 편지를 한 번 더 눌렀다. 종이는 조용했다. 그러나 그 끝에 닿아 있던 글자는 더 이상 조용히 덮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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