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로
관문은 생각보다 낮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성벽이 산등성이처럼 하늘을 가르고 선 듯했으나, 가까이 다가서자 흙먼지 낀 돌과 기름때 묻은 문짝, 졸린 병졸들의 눈꺼풀이 먼저 보였다. 성루 위 깃발은 밤새 내린 안개를 털지 못해 축 늘어져 있었다. 문 안쪽에는 수향으로 들어가려는 수레가 줄을 섰고, 문 바깥쪽에는 떠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제각각 흩어졌다.
진소백은 줄 끝에서 보퉁이 끈을 고쳐 멨다.
천에 싼 부러진 검은 낡은 봇짐 속에 있었다. 무기가 아니었다. 고진명이 남긴 유품이었다. 스승의 편지는 품 안에 넣었다. 종이 몇 장일 뿐인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뼈 아래에서 작은 돌처럼 무게를 냈다.
유란은 그의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관문 옆 벽에 붙은 방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가, 줄을 지나가는 행상들의 입 모양을 흘끗 보았다. 방에는 도둑을 잡는다는 글도 있었고, 도망친 역부를 찾는다는 글도 있었다. 먹이 번져 알아보기 어려운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저런 건 믿을 만합니까?”
진소백이 물었다.
유란이 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믿을 만한 것도 있고, 믿으라고 붙인 것도 있지.”
“차이가 큽니까?”
“잡히는 사람에게는 크겠지.”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아래쪽에 말라붙은 풀잎 하나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 손끝에 침을 묻혀 붙였다가 그대로 잊은 것 같았다.
그는 선화를 떠올렸다.
노 한 짝을 두 손으로 세워 안고 있던 아이. 끝내 돌아오느냐고 묻던 얼굴. 진소백은 객잔 주인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왔지만, 부탁만으로 지켜지는 것은 없었다. 곽서의 물길은 여전히 그 아이의 발밑을 지날 것이다. 수향은 등 뒤로 멀어졌으나, 그 물음만은 아직 발끝을 따라왔다.
“차례!”
앞쪽 병졸이 창대를 바닥에 쿵 찍었다.
진소백은 정신을 돌렸다. 앞에 있던 장정 둘이 관문을 지나갔다. 등짐이 흔들릴 때마다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병졸은 그들의 짐을 제대로 들춰보지도 않았다.
진소백의 차례가 되자 병졸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로 가나?”
“낙양 쪽입니다.”
그 말을 입 밖에 내자 이상하게 낯설었다. 어제까지는 글자였다. 스승의 편지 속에 적힌 지명이었다. 이제는 길 위에서 말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병졸이 손을 내밀었다.
“문패.”
진소백은 작은 목패를 건넸다. 병졸은 이름을 읽으려다 눈살을 찌푸렸다. 오래된 먹이 흐려진 탓이었다.
“진…… 소백?”
“그렇습니다.”
“수향 사람인가?”
“예.”
병졸의 눈이 진소백의 허리춤을 지나 어깨에 멘 약낭에서 멈췄다. 약초 냄새가 은은히 배어 나오는 낡은 주머니였다.
“의원인가?”
“배우는 중입니다.”
“배우는 중인 놈이 낙양까지 혼자?”
유란이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길이 같을 뿐입니다.”
병졸이 피식 웃었다.
“길이 같은 게 같이 가는 거지.”
그는 목패를 돌려주며 손등으로 문 바깥을 가리켰다.
“바깥 길은 요즘 뒤숭숭하다. 해 지기 전에 숙소 잡아라. 특히 약 냄새 나는 짐은 눈에 잘 띈다.”
진소백은 목패를 받아 넣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관문 아래 그늘은 차가웠다. 진소백은 그 짧은 어둠을 지나며 걸음을 늦추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문턱을 넘는 순간 발끝이 살짝 걸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가 바로 섰다. 유란은 옆에서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문 바깥의 길은 안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흙길은 흙길이었고, 양쪽에는 낮은 풀과 논밭이 이어졌다. 다만 뒤돌아보면 수향의 지붕들이 성벽 아래에 눌린 듯 낮게 붙어 있었다. 그 위로 연기가 몇 줄기 올라갔다. 아침밥을 짓는 연기인지, 무너진 집을 태우는 연기인지 멀리서는 알 수 없었다.
진소백은 한참 동안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결국 돌아보았다.
수향은 작았다.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은 작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오니 마을은 손바닥에 들어갈 듯했다. 사람이 죽고, 이름이 오르고, 누군가 뒤를 밟았는데도 성벽은 낮고 지붕은 얌전했다.
유란이 말했다.
“후회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나온 것.”
진소백은 성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남았어도 답은 없었을 겁니다.”
“그럼 후회는 아니군.”
“아직 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유란은 길가에 떨어진 마른 가지를 발끝으로 밀어냈다.
“그런 일도 있어.”
앞서 가던 노새가 길 한복판에 멈춰 섰다. 주인이 욕을 하며 끈을 당겼지만 노새는 귀만 까딱였다. 그 바람에 사람들의 걸음이 잠시 엉켰다. 짐꾼 하나가 어깨에 멘 자루를 바로잡으며 투덜댔다.
“낙양 길이라더니 벌써부터 막히는군.”
“막히는 게 길 탓이면 다행이지. 요 며칠 큰길에서 짐 잃은 놈들이 한둘이 아니래.”
“관아는 뭐 하나?”
“관아가 길 위까지 따라와 주면 강호가 왜 있겠나.”
그 말에 몇 사람이 낮게 웃었다. 웃음은 짧았다. 누군가가 소매 속을 더 깊이 여미고, 다른 이는 허리띠에 찬 패를 겉으로 드러냈다. 진소백은 그 패의 문양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낮아졌다가 비껴가는 것을 보았다.
강호라는 말은 수향 안에서는 먼 소리였다. 관문을 지나자 그것은 사람들의 어깨와 발걸음 사이에 있었다.
“당신은 왜 갑니까?”
진소백이 물었다.
유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노새가 겨우 옆으로 빠지고, 길이 다시 풀렸다. 그녀는 그 틈을 지나며 말했다.
“확인할 게 있어.”
“낙양에?”
“길 위에.”
진소백은 그녀를 보았다.
유란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
“너 혼자 가면 너무 많이 놓칠 것 같기도 하고.”
“그건 걱정입니까?”
“계산이지.”
“내가 놓치는 것이 당신에게 필요합니까?”
유란은 그제야 그를 보았다. 눈빛은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필요해질지도 모르지.”
진소백은 더 묻지 않았다. 유란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고, 아는 것을 안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그 점이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수향에서 그녀의 비껴 보는 눈은 몇 번이나 길을 바꾸었다.
길은 낮게 내려가 강가로 이어졌다. 관문에서 낙양으로 가는 큰길을 그대로 타면 돌아가야 했고, 나루를 건너면 반나절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한 이는 관문 앞에서 만난 기름 장수였다. 그는 자기 말이 세상에서 제일 값싼 정보라는 듯 웃으며, 대신 배 삯은 흥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루터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닭장 냄새와 젖은 밧줄 냄새가 섞였다. 강물은 넓었으나 빠르지 않았다. 흐린 하늘이 물 위에 길게 눕고, 배 두 척이 번갈아 사람과 짐을 실었다. 뱃사공은 굵은 팔로 노를 기대고 서서 사람들을 눈대중으로 세었다.
“두 명 더! 짐 큰 놈은 다음 배!”
“우린 짐이 크지 않소!”
“네 배가 크잖아!”
사람들이 웃었다. 욕을 먹은 사내도 결국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진소백은 나루터 끝에 섰다. 물가에는 부서진 갈대가 떠밀려 와 있었다. 흙탕물이 갈대 사이를 스치고, 작은 거품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때 하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왔다.
하나가…… 많아.
진소백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그는 강물을 보았다. 물 위에서 반짝이는 빛이 잘게 흔들렸다.
하나가 많다.
무엇이 많다는 말인가. 사람인가. 이름인가. 거짓인가. 죽음인가.
그는 품 안쪽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의 모서리가 옷감 너머로 느껴졌다. 명단. 스승의 편지. 적힌 이름들. 어떤 이름은 이미 죽은 자와 이어졌고, 어떤 이름은 아직 얼굴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스승이 남긴 흔적이라 여겼다. 그 다음에는 누군가의 과거라 여겼다. 이제는 그 종이 위에 자기 이름까지 희미하게 비치는 듯했다.
진소백.
병졸이 조금 전 더듬어 읽은 이름.
그 이름을 누가, 왜,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맞추면 병의 뿌리가 아니라 열만 좇게 된다. 열이 내렸다고 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배가 닿았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노새와 짐꾼, 아이를 업은 여자, 붉은 끈으로 상자를 묶은 상인이 좁은 판자를 건넜다. 판자가 삐걱거릴 때마다 물이 찰박였다. 진소백은 유란이 먼저 오르기를 기다렸다.
유란이 그를 보았다.
“왜?”
“판자가 흔들립니다.”
“내가 못 건널까 봐?”
“그렇다기보다……”
유란은 대답을 듣지 않고 판자를 건넜다. 흔들리는 판자 위에서도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소백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뒤따랐다.
배 안은 좁았다.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피하며 앉았다. 닭장 속 닭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려다 어머니의 손에 입이 막혔다. 뱃사공은 마지막 짐을 밀어 넣고 밧줄을 풀었다.
“가만히들 있어! 물에 빠지면 건져는 주는데, 짐은 못 건진다!”
배가 강 가운데로 밀려났다.
수향 쪽 강둑이 천천히 멀어졌다. 관문도, 지붕도, 희미한 연기도 뒤로 빠졌다. 진소백은 배 가장자리의 낮은 난간에 손을 얹었다. 오래 젖었다 마른 나무결이 손바닥 밑에서 거칠었다.
복수라는 말은 곧았다. 곧은 말은 마음의 열을 올리기 쉬웠다. 그러나 의원은 열만 보고 처방하지 않는다. 상처가 어디서 열렸는지, 피가 어디로 새는지, 독이 어느 맥을 타고 도는지 짚어야 했다. 죽인 자를 찾는 것만으로는 왜 죽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스승이 무엇을 숨겼는지 모른 채 손을 대면, 닫아야 할 상처를 더 벌릴 수도 있었다.
진소백은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
유란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맞은편 사람들 쪽으로 턱을 조금 기울였다. 붉은 끈 상인은 상자 위에 팔을 올려놓고 졸았고, 아이를 업은 여자는 자꾸만 뒤쪽 강둑을 돌아보았다. 상인의 신발 끝에는 마른 진흙이 두껍게 굳어 있었다. 물길을 건너는 사람치고는 너무 오래 산길을 밟은 흔적이었다.
“낙양까지 바로 갈 생각이야?”
유란이 물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생각만?”
“길을 모릅니다.”
“그건 솔직하네.”
“당신은 압니까?”
“조금.”
“조금이면 충분합니까?”
“네가 너무 빨리 걷지만 않으면.”
진소백은 잠시 물살을 보았다.
“나는 빨리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보인다.”
“하지만 급히 손을 대면 맥을 놓칩니다.”
유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걸 알면 절반은 덜 헤매.”
“나머지 절반은요?”
“헤매면서 배우는 수밖에.”
배가 강 한복판을 지날 때 바람이 조금 세졌다. 닭장 위에 덮은 헝겊이 들썩였다. 뱃사공이 욕을 하며 노를 바로잡았다. 사람들은 몸을 낮췄다. 진소백은 자연스레 유란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유란은 이미 배 가장자리의 밧줄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너, 손부터 나가는 버릇 있구나.”
“방해가 됐습니까?”
“아직은.”
“고치겠습니다.”
“다 고칠 필요는 없어. 먼저 닿은 손 때문에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진소백은 그 말을 곱씹었다. 수향에서 그의 손은 늦은 적도 있었고, 빠른 적도 있었다. 빠른 손이 누군가를 살렸는지, 늦은 손이 누군가를 잃게 했는지 그는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이제는 모든 죽음을 한꺼번에 자기 품으로 끌어안고 멈춰 설 수 없었다. 손은 비워 두어야 했다. 다음 사람의 맥을 짚기 위해서라도.
강 건너 나루가 가까워졌다.
그쪽에는 작은 찻집 하나와 말뚝에 묶인 말 세 필이 있었다. 찻집 처마 아래에는 젖은 삿갓들이 거꾸로 걸려 있었다. 벽에 붙은 낡은 종이에는 ‘낙양 행 상단 동행 구함’이라는 글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 아래로 작은 글씨들이 여럿 덧붙어 있었다. 호위 셋. 짐꾼 둘. 의원 있으면 삯 후함.
배가 닿자 사람들이 서둘러 내렸다. 상인은 자기 상자를 끌어안고 먼저 뛰듯이 나갔고, 아이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뱃사공은 판자를 다시 놓으며 혀를 찼다.
“울 거면 배 안에서 울지 그랬냐. 강도 심심했을 텐데.”
아이 어머니가 눈을 흘겼다.
진소백은 배 삯을 내고 강둑에 올랐다. 땅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한 걸음 멈춰 균형을 잡았다. 유란은 벌써 찻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차 한 잔 하고 가자.”
“시간이 늦어집니다.”
“늦어지는 게 아니라 길을 묻는 거야.”
찻집 안은 반쯤 비어 있었다. 주인은 큰 솥 옆에서 잔을 씻고 있었다. 벽에는 말린 생선과 싸구려 술병이 함께 걸려 있었다. 구석 탁자에는 길손 셋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팔목에 검은 천을 감았고, 한 사람은 대나무 통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남은 한 사람은 모자를 깊이 눌러써 눈이 보이지 않았다.
진소백이 들어서자 그들의 말이 잠깐 멎었다.
곧 검은 천을 감은 사내가 낮게 웃었다.
“약 냄새가 나는데.”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이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보았다.
“어디까지 가시오?”
유란이 말했다.
“낙양 쪽.”
주인의 눈이 진소백의 약낭과 목패 쪽을 차례로 지나갔다. 목패는 옷깃 아래에 반쯤 드러나 있었다.
“수향에서 왔소?”
진소백은 잔을 받던 손을 멈췄다.
“그렇습니다.”
구석 탁자에서 대나무 통을 품은 사내가 의자를 삐걱 밀었다.
“수향이라. 요 며칠 관문 안쪽이 시끄러웠다던데.”
“사람 이름이 걸렸다는 말도 있더군.”
“물가 마을에서 이름이 걸리면 대개 빚 아니면 피지.”
진소백은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등에 힘줄이 살짝 섰다. 유란의 발끝이 탁자 아래에서 그의 발 옆을 가볍게 건드렸다. 멈추라는 신호처럼 짧았다.
진소백은 사내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검은 천 아래 손목은 부어 있었다. 오래된 염좌였다. 찻잔을 들 때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대나무 통을 품은 사내는 왼쪽 허리를 비우고 앉았다. 그 빈자리를 자꾸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오른발 앞코가 출입문을 향해 있었다.
완력으로 맞설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는 누가 먼저 일어나는지, 누가 문을 막는지, 누가 이름을 입에 올리는지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막혔다.
주인이 헛기침을 했다.
“여긴 차 파는 곳이지, 관아 앞마당이 아니오.”
검은 천 사내가 웃었다.
“우리가 뭘 했다고 그러시오.”
“차값 먼저 내시오. 말이 길어지는 손님은 대개 잔을 깨고 나가더군.”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주인을 보다가 다시 진소백을 보았다.
“의원이라면 손목 좀 봐 줄 수 있나?”
진소백은 사내의 손목을 보았다.
“지금 풀어 주면 당장은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럼 봐.”
“하지만 붓기가 가라앉기 전에는 다시 틀어집니다. 뜨거운 술을 줄이고, 천을 너무 세게 감지 마십시오. 피가 손끝까지 가지 않습니다.”
사내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천을 감은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본 척 좀 하는군.”
“보인 것만 말했습니다.”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솥에서 김이 올랐다. 주인이 두 사람 사이에 잔을 밀어 넣었다.
“낙양 가려면 큰길 타지 마시오.”
그 말은 진소백에게 한 말이었다.
“도적 떼 소문 때문입니까?”
진소백이 물었다.
주인은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은 늘 반만 맞소. 문제는 그 반이 어느 쪽인지 길 위에서야 드러난다는 거지. 짐 있는 사람들은 요즘 상단에 붙어 가오. 아니면 북쪽 언덕길로 돌아가시오. 하루 더 걸리지만 객점이 두 군데 있소.”
유란이 잔을 들었다.
“상단은 언제 떠나지?”
주인은 벽에 붙은 종이를 턱짓했다.
“해 기울기 전에 한 번 모일 거요. 다만 공짜 동행은 없소. 호위에게는 자리값, 의원에게는 증명, 잡일꾼에게는 등짐을 요구하지.”
진소백은 벽의 글씨를 보았다. 의원 있으면 삯 후함. 그 문장이 낯설게 다가왔다. 수향에서 의원은 사람을 살리는 손이었다. 길 위에서는 약낭도 값이 되고 표적도 되었다.
검은 천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낙양은 왜 가나?”
진소백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사내의 질문은 가벼웠지만, 주변의 귀가 함께 기울었다. 그는 잔의 물빛을 보았다. 맑지 않았다. 찻잎 가루가 바닥에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산 사람?”
“그걸 확인하러 갑니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의원답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다니.”
진소백은 그 웃음에 맞서지 않았다.
“죽은 뒤에도 남는 병이 있습니다.”
주인이 잠시 손을 멈췄다. 유란은 잔을 내려놓았다. 구석 탁자의 다른 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 검은 천 사내는 손목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북쪽 언덕길로 가시오.”
주인이 다시 말했다.
“큰길이 빠르긴 해도, 빠른 길이 늘 먼저 도착하게 해 주지는 않소.”
찻집을 나왔을 때 해는 구름 뒤에 기울어 있었다. 길 위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유란은 주인이 말한 북쪽 언덕길로 걸음을 돌렸다. 진소백은 잠시 큰길 쪽을 보았다. 사람과 수레가 더 많았다. 먼지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확인하러 가고 싶어?”
유란이 물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 왜 안 가?”
진소백은 손바닥에 남은 찻잔의 온기를 느꼈다. 손목을 감춘 사내의 붓기, 목패를 본 주인의 눈, 상단 모집 종이 아래 덧붙은 작은 글씨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지금은 큰 상처를 벌릴 때가 아닙니다.”
유란은 대답 대신 앞서 걸었다.
진소백은 뒤따랐다. 수향은 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는 그를 한자리에 붙잡지 않았다. 하 노인의 말은 잊지 않을 것이다. 선화의 물음도, 곽서의 물길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 앞에서만 서 있을 수 없었다. 상처는 들여다봐야 했다. 덮어 두어 썩는지, 열어 두어 피가 마르는지 가려야 했다.
길은 강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낮은 언덕 위로 올라서자 물줄기가 옆으로 길게 보였다. 배가 하나, 둘 점처럼 움직였다. 바람이 풀밭을 눕혔다. 멀리 찻집 지붕은 손톱만큼 작아졌다.
진소백은 그제야 품 안의 종이를 꺼냈다.
스승의 편지부터 펼치려다 멈추고, 명단을 꺼냈다.
종이는 여러 번 접었다 편 자국으로 약해져 있었다. 이름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먹의 농담, 획의 길이, 낯익은 글자와 낯선 글자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진소백은 걸음을 늦추며 하나씩 내려다보았다. 수향에서 보았던 흔적들과 맞물리는 이름도 있었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도 있었다.
하나가 많아.
그 말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강물 소리와 섞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갔다. 처음부터 다시, 접힌 자리부터 다시, 이름의 끝과 다음 이름의 첫 획 사이를 놓치지 않으려 천천히 짚었다. 그런데도 마음속의 수는 제자리에 놓이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 한 번 더 건너뛴 듯했고, 어느 곳에서는 같은 맥을 두 번 짚은 듯했다. 다시 살피면 종이는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종이 앞에서 불안만 자꾸 늘었다.
“또 보고 있어?”
유란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맞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가?”
“그걸 모르겠습니다.”
“모르는데 맞지 않는 건 알아?”
진소백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환자가 아프다고 말하는데, 겉으로는 멀쩡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같은 곳을 여러 번 짚게 됩니다.”
“좋은 버릇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짚겠지.”
진소백은 명단을 접으려 했다. 그때 바람이 불어 종이 한쪽이 들렸다. 접힌 면이 젖은 잎처럼 벌어지며 이름 몇 줄이 드러났다. 진소백은 손바닥으로 누르려 했다.
유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걷지 않았다.
진소백도 멈췄다. 처음에는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길 위에 누군가 나타났나 싶어 앞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언덕길 아래로 강물이 보이고, 멀리 찻집 지붕이 작아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유란을 보았다.
유란의 시선은 명단 위에 있었다. 종이 전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한곳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빛이 조금 달라졌다. 놀랐다고 하기에는 소리가 없었고, 모른 척한다고 하기에는 눈꺼풀이 너무 늦게 내려갔다.
진소백은 손을 조금 치우려 했다.
그 순간 유란의 소매가 바람에 밀려 내려왔다. 그녀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손끝으로 종이의 들린 모서리를 눌렀다. 넓은 소매와 손등이 이름 몇 줄을 가렸다. 진소백의 자리에서는 어느 줄에서 그녀의 시선이 멈췄는지 볼 수 없었다. 먹줄의 끝과 획의 일부만 소매 아래로 삐져나와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유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지나갔다. 종이 끝이 떨렸다. 진소백은 명단을 붙든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유란.”
그가 낮게 불렀다.
그녀는 그제야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아주 짧았다. 그 숨 때문에 진소백은 오히려 더 묻지 못했다. 수향에서 여러 번 보았던 유란의 얼굴은 대개 한 박자 늦게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은 뜻이 먼저 와서 얼굴을 굳힌 듯했다.
진소백이 물었다.
“이 명단을 압니까?”
유란의 눈이 소매 아래 가려진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강물이 아래에서 흐르고 있었다. 관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수향도, 그 연기도, 지나온 문턱도 길 뒤로 사라졌다. 진소백은 명단을 접지 않았다.
유란이 낮게 흘렸다.
“이 이름을…… 내가 알아.”
이 화,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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