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돌
오후 산비탈에는 사람 기척보다 먼저 쇠비린내가 남아 있었다.
진소백은 개울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물은 발목 아래 흰 거품을 만들며 흘렀고, 건너편 바위에 묻은 진흙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산짐승 발자국이 아니었다. 짚신도 아니었다. 앞코가 뾰족하고 뒤축이 깊게 박힌, 강호 객들이 신는 가죽신 자국이었다.
약방에 누워 있던 칼 맞은 객이 그런 신을 신고 있었다. 이름을 묻자 입을 다물고, 문파를 묻자 웃던 사내였다. 그 사내는 밤새 열을 앓다가 새벽녘에 한마디를 흘렸었다.
“산길에서 붉은 매듭을 보면 돌아가라. 그건 길표가 아니라 경고다.”
그때 진소백은 헛소리로 넘겼다. 지금은 그 말이 개울 소리 밑에서 다시 올라왔다.
고진명 의원은 예전에 이렇게 일러 주었다. 개울을 만나면 건너지 말고 오른쪽으로 붙어라. 길이 사라진 듯 보여도 물소리를 등지고 걸으면 다시 사람 하나 지날 틈이 나온다.
진소백은 오른쪽 산허리로 붙었다. 봇짐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 안에는 약포 몇 개와 천으로 감싼 유품이 들어 있었다. 부러진 검 조각은 봇짐 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둔하게 부딪혔다. 손에 쥘 물건이 아니라, 죽은 이가 남긴 짐이었다.
풀잎이 무릎을 때렸다. 낮은 가지가 옷깃을 잡았다. 얼마 가지 않아 잘린 덩굴이 보였다. 바람이나 짐승이 끊은 모양이 아니었다. 한 번에 비스듬히 베인 자국이었다. 진소백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단면을 보았다. 물기가 아직 맺혀 있었다. 아주 오래된 흔적은 아니었다.
그는 덩굴 옆에서 붉은 실 한 오라기를 보았다. 나뭇가지에 걸린 채 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매듭은 풀려 있었으나 색은 선명했다. 객잔 주인이 술상 밑에서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낙양 쪽에서 온 자들이 산마다 표시를 남긴다더라. 길을 잃은 사람을 돕는 표식이 아니라, 남이 다녀갔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라고 했다.
진소백은 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마을 소리는 어느 순간 끊겨 있었다. 개울 소리만 따라오다가 바위 뒤로 낮아졌다. 산은 조용했으나 빈 조용함은 아니었다. 누군가 먼저 지나간 길은, 아무도 없는 길보다 더 무거웠다.
바위가 둘로 갈라진 곳은 생각보다 작았다. 멀리서 보면 벼락 맞은 돌무더기 같았으나 가까이 가니 틈이 분명했다. 아래쪽 길은 낙엽이 밀려 내려가며 넓게 열려 있었다. 위쪽 길은 덩굴과 돌뿌리 사이로 가늘게 이어졌다.
고진명 의원은 위로 가라고 했었다.
진소백은 아래쪽을 보았다. 누구라도 그쪽으로 가고 싶을 길이었다. 발을 헛디딜 염려도 적고, 햇빛도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래쪽 길 가장자리의 풀은 넓게 눌려 있었다. 여럿이 오간 흔적이었다. 위쪽 길은 좁고 험했지만, 사람이 일부러 꺼린 길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위로 올랐다.
발끝이 몇 번 미끄러졌다. 손을 짚은 돌은 차고 미끈했다. 이끼가 손바닥에 묻었으나 그는 닦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감아 돌자 길은 갑자기 평평해졌다. 그곳부터 나무들이 서로 몸을 기대듯 빽빽했다.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진소백은 다시 멈추었다.
나무 하나가 허리 높이에서 패여 있었다. 칼자국이라기보다, 무거운 쇠붙이가 스치며 껍질을 찢은 자국이었다. 그 아래에 검은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피인지 수액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진소백은 손을 대지 않았다. 냄새만 맡았다. 오래된 약방 마룻바닥에 밴 피 냄새와 닮아 있었다.
그는 숨을 낮추고 걸었다.
길의 끝은 그렇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낮은 흙더미 하나가 있었고, 그 앞에 돌 하나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봉분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낮고 무너져 있었다. 누군가 한때 둥글게 다듬었을 자취만 남아, 산비탈의 작은 부풀음처럼 보였다.
돌도 비석답지 않았다. 키가 크지도 않았고, 위엄도 없었다. 한쪽 모서리는 깨져 있었고, 표면은 비바람에 벗겨져 있었다. 젖은 이끼가 허리께까지 올라와 있었으며, 그 사이에 마른 흙이 박혀 있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봉분 주변 풀은 제멋대로 자랐는데, 비석 앞 한 걸음 너비만큼은 눌려 있었다. 오래 무릎을 꿇은 자리처럼.
진소백은 그 앞에 섰다.
앞면은 비어 있었다.
이름도 없고, 관직도 없고, 생몰의 자취도 없었다. 누군가를 묻은 돌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진소백은 소매 끝으로 표면을 문질렀다. 검은 물때가 묻어 나왔다. 돌의 결이 살을 긁었으나 글자는 나오지 않았다.
고진명 의원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무덤을 파거라. 무엇을 발견하든 네 아버지라고는 믿지 마라.
무덤은 있었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할 이름이 없었다.
진소백은 비석의 앞면을 더 살폈다. 새겼다가 지운 흔적도, 도드라진 가장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비워 둔 돌처럼 매끈하게 닳아 있었다. 강호에서 이름을 숨긴 무덤은 드물지 않았다. 원한이 많은 자, 문파에서 파문된 자, 혹은 죽어서도 추적당하는 자. 약방을 찾은 늙은 표사가 술기운에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름 없는 돌은 죽은 자보다 산 자를 위해 세우는 것이라고.
진소백은 옆으로 돌아갔다.
오른쪽 옆면은 나무뿌리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뿌리가 돌을 끌어안듯 굵게 휘어 있었고, 그 아래 이끼가 두껍게 자라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손톱으로 이끼를 떼어 냈다. 축축한 이끼는 질겼다. 뜯어낸 자리에서 검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봇짐을 내려놓은 뒤, 그는 약재칼을 꺼냈다. 고진명 의원의 방에서 약재를 다듬을 때 쓰던 작은 약방 도구였다. 손잡이는 닳아 반질했고, 끝은 무디어져 있었다. 사람을 겨누는 물건이 아니라 마른 뿌리를 자르고 굳은 약재를 쪼개던 물건이었다.
그는 약재칼의 무딘 끝으로 이끼를 조금씩 밀어냈다.
돌 옆면 아래쪽에 희미한 선이 드러났다.
가로로 짧게 뻗은 획 하나. 그 아래 비스듬히 죽은 선 하나. 너무 닳아 시작과 끝이 사라져 있었다. 진소백은 도구를 거두고 손끝으로만 더듬었다. 움푹한 곳과 솟은 곳이 간신히 구별됐다.
조금 더 아래, 비석이 땅과 만나는 자리 가까이에 또 다른 자국이 있었다. 세로로 내려간 듯한 흔적 하나, 끝에서 꺾인 흔적 하나. 글자라면 글자였고 흠이라면 흠이었다.
진소백은 봇짐 안쪽에 넣어 둔 낡은 종이를 떠올렸다. 스물세 개의 이름. 그중 하나에 덧씌워진 듯한 眞少白. 한 귀퉁이에 따로 남아 있던 已 표식. 그리고 고진명 의원이 죽기 전 중얼거린 말.
하나가 많아.
그 말들은 지금도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맞물리지 않는 조각들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남아 있었다.
진소백은 비석의 옆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억지로 읽으려 할수록 글자는 흐려졌다. 의술도 마찬가지였다. 맥이 약할 때 억지로 병명을 붙이면 사람을 죽인다. 보이는 것만 보아야 했다.
앞면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옆면 아래에는 숨기듯 남은 획들이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뒤로 물러서려다 비석 뒤편 흙 위에서 작은 구멍들을 보았다. 바늘로 찍은 듯한 구멍이 세 개,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었다. 향을 꽂은 자국 같기도 했다. 그러나 향 냄새는 없었다. 구멍 가장자리는 무너지지 않았고, 안쪽은 아직 어두웠다.
최근에 누군가 여기 섰다.
진소백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산은 여전히 조용했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 사이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무덤을 파거라.
고진명 의원의 목소리는 명령처럼 남아 있지 않았다. 죽기 직전의 숨이 섞인 말이었다. 그래서 더 거스를 수 없었다. 진소백은 약재칼을 봇짐 옆에 놓고 봉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처음 흙을 걷어 내는 손길은 서툴렀다. 봉분 위 낙엽부터 치웠다. 젖은 잎은 서로 붙어 덩어리째 밀려났다. 그 아래 흙은 검고 무거웠다. 산비탈의 흙냄새와 달랐다. 닫힌 곳에 고인 냄새였다.
그는 약재칼로 표면을 긁고, 손으로 흙을 떠냈다. 큰 힘을 주면 돌이나 뿌리에 걸려 손목이 울렸다. 약방 도구는 금세 흙을 뒤집어썼다. 진소백은 그것을 내려놓고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흙을 한 줌씩 떠내 옆에 쌓았다. 봉분의 둥근 모양이 조금씩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것이 나왔다.
뿌리였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뿌리가 아니었다. 굵은 뿌리 하나가 관 쪽으로 뻗다가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끊긴 단면은 썩어 검게 변했으나, 결은 매끄러웠다. 사람 손으로 자른 흔적이었다. 그것도 봉분이 만들어진 뒤, 위에서 파고 들어와 자른 듯했다.
진소백은 흙 묻은 손을 멈추었다.
누가 먼저 팠다. 아주 깊이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이 봉분을 건드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바람이 나뭇잎을 스쳤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침묵은 이제 산의 침묵이 아니라, 숨을 죽인 사람의 침묵처럼 느껴졌다.
진소백은 다시 팠다. 이번에는 더 넓게 흙을 걷어냈다. 흙 속에서 작은 천 조각이 따라 나왔다. 검붉은 빛의 헝겊이었다. 매듭을 묶었다 풀어 놓은 듯 가운데가 꼬여 있었다. 개울가에서 본 붉은 실과 같은 색이었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 보았다. 물에 젖고 흙에 눌려 형태는 흐려졌지만, 가장자리 한쪽에 노란 실밥이 남아 있었다. 약방 손님들의 옷에서는 보지 못한 직조였다. 강호 객들이 문파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때, 허리끈 안쪽이나 검집 매듭에 이런 표식을 숨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진소백은 천 조각을 비석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 봇짐 옆 깨끗한 잎 위에 따로 두었다. 증좌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원의 버릇이었다.
해가 기울었다. 나무 사이 빛이 엷어졌다. 진소백의 손톱 밑은 검게 찼고, 손가락 끝은 저렸다. 그는 뿌리를 만나면 약재칼의 무딘 끝으로 흙을 먼저 걷고, 손으로 꺾어냈다. 무덤을 파는 일은 죽은 이를 욕보이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멈추는 일은 고진명 의원의 마지막 숨을 흙에 묻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몸을 더 낮추었다.
한참 뒤 손끝에 다른 감촉이 닿았다.
흙도 돌도 아니었다. 단단했지만 바위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진소백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어두운 직선이 드러났다. 곧고 얕은 선이었다. 그는 그 선을 따라 흙을 밀었다. 뿌리와 흙덩이가 떨어져 나가며 길고 평평한 면이 모습을 보였다.
널의 가장자리였다.
무덤이라는 것을 알고 팠으면서도, 실제로 그 아래 닫힌 것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진소백은 숨을 내쉬지 못한 채 더 넓게 흙을 치웠다. 가로로, 다시 세로로. 어둠 속에서 직선이 이어졌다. 봉분 아래 묻힌 관은 닫혀 있었고, 눌린 흙 속에서도 제 모양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때 관 가장자리에서 얇은 줄 하나가 나왔다.
삼베줄이었다. 썩어 끊어질 듯 보였으나 매듭만은 또렷했다. 관 뚜껑과 옆판을 묶은 줄이 아니었다. 누군가 뚜껑 위에 따로 걸어 둔 봉인처럼 보였다. 줄 가운데에는 작은 나무패가 끼워져 있었다. 손톱 두 개만 한 크기였다.
진소백은 흙을 털어냈다.
나무패에는 글자가 깊게 찍혀 있었다.
已.
비석 옆면에서 보았던 끊어진 획들이 눈앞에서 겹쳐졌다. 낡은 종이 귀퉁이에 남아 있던 표시도 함께 떠올랐다. 진소백은 목 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사전에서 보았던 뜻까지는 떠올랐으나, 지금 이 산속에서 그 뜻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가, 왜, 관 위에 이것을 남겼는지가 더 무거웠다.
그는 나무패를 떼지 않았다. 맥을 짚을 때 손가락을 함부로 옮기지 않듯, 그 자리 그대로 보았다.
그리고 매듭 아래에 다른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 조각이었다. 검붉은 매듭 천과 달랐다. 희게 바랜 무명천. 가장자리에는 약재 가루가 스며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진소백은 그 무늬를 알고 있었다. 고진명 의원의 약방에서 독한 환약을 싸던 천이었다. 쉽게 찢어지지 않게 두 겹으로 접고, 모서리를 안으로 말아 넣는 방식까지 같았다.
그 천은 관 뚜껑의 틈에 끼워져 있었다. 누군가 열려던 것을 막은 것처럼, 혹은 열라고 남긴 것처럼.
진소백은 손을 뻗었다가 멈추었다.
비석 앞면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옆면 아래의 몇 획은 어둠에 잠겨 희미했다. 관 위의 已 표식은 흙 속에서도 선명했다. 산 아래에서는 낙양으로 가는 길이 어둠 속에 묻히고 있을 터였다.
그는 다시 관을 보았다.
진소백의 손끝이 고진명 의원의 약방 천 조각에 닿았다.
이 화,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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