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진 방
문지방에 흙이 묻어 있었다.
처음에는 비린 강냄새가 먼저 왔다. 밤새 물안개를 머금은 나무판자 냄새, 젖은 삿갓을 오래 걸어 둔 냄새, 오래된 기침이 벽지에 스민 듯한 냄새. 하 노인의 집은 늘 그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문 앞에 선 진소백은 그 속에 섞인 낯선 냄새를 맡았다.
새 흙.
비가 온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문지방 한쪽에 진흙이 얇게 눌려 있었다. 누군가 젖은 강가를 밟고 와서, 조심하지 못한 발끝으로 그 자리를 지나간 흔적이었다.
진소백은 손에 든 약낭을 조금 고쳐 쥐었다. 허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승의 부러진 검은 객잔 보따리 깊은 곳에 싸여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은 말린 맥문동 몇 뿌리와 감초, 천패모 가루를 담은 작은 종이봉지, 그리고 어제 린치판에서 얻은 멍뿐이었다.
“하 어르신.”
대답이 없었다.
강 쪽에서 물새가 울었다. 마을은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았다. 장터 골목에는 국솥을 올리는 연기만 낮게 피어 있었고, 허봉의 집 쪽에서는 아이 기침 소리가 바람을 타다 말았다. 진소백은 다시 한 번 불렀다.
“하 어르신, 저입니다.”
이번에는 안쪽에서 아주 가는 소리가 났다. 물건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이 숨을 삼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진소백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열린 것도 아니었다. 누가 안에서 제대로 닫지 못한 문처럼 삐걱이며 밀렸다.
방 안은 뒤집혀 있었다.
하 노인의 살림은 원래 적었다. 낡은 이부자리 하나, 낮은 밥상, 벽에 기대 둔 노 몇 개, 땔감을 넣는 궤짝, 물 묻은 삿갓, 해진 겨울옷 두 벌. 적으니 어지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적은 것들이 모두 제 자리를 잃어 있었다.
이부자리는 속을 까뒤집은 배처럼 벌어져 있었고, 베개 속 메밀껍질이 방바닥에 흩어졌다. 궤짝은 반쯤 열린 채 기울어 있었으며, 안에 있던 낡은 옷들이 축축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벽지 한 귀퉁이는 손톱으로 긁은 듯 찢겼고, 부엌으로 난 작은 문 앞에는 깨진 사기 그릇 조각이 널렸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밥상 아래에 놓인 동전 꾸러미가 그대로였다.
진소백은 무릎을 굽혀 그것을 보았다. 헝겊 매듭이 풀리지도 않았다. 사공 일로 모은 잔돈일 터였다. 큰돈은 아니었으나, 가난한 집을 뒤진 자가 그냥 두고 갈 돈도 아니었다. 벽 틈에 끼워 둔 낡은 은비녀도 있었다. 아마 죽은 아내의 물건인지, 하 노인이 가끔 먼지를 털던 것이었다. 그것도 그대로였다.
누군가 돈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진소백은 방 안쪽을 보았다. 하 노인은 벽과 아궁이 사이, 그늘진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마른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얼굴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잿빛이었다. 입술은 말라 갈라졌고, 눈은 진소백을 보고도 한 박자 늦게 초점을 잡았다.
“하 어르신.”
하 노인의 목에서 소리가 긁혀 나왔다.
“나는…… 모른다.”
그 말부터였다.
진소백은 방 안으로 들어서다 멈췄다. 깨진 그릇 조각이 발밑에서 아주 작게 울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피했다. 노인의 눈이 그의 발을 따라갔다. 누군가 다시 물건을 밟고 뒤지는 줄 아는 눈이었다.
“제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진소백은 약낭을 들어 보였다.
“어르신 기침 보러 왔습니다. 어제 일 뒤로 몸이 더 상하셨을 것 같아서요.”
하 노인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는 대답 대신 마른 기침을 했다. 처음엔 한 번, 곧 이어 두 번, 그러다 가슴 안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길게 이어졌다. 웅크린 몸이 앞으로 꺾였다. 진소백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갔다가, 노인이 움찔하자 멈췄다.
그는 낮게 말했다.
“제가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하 노인은 벽에 등을 더 붙였다. 그러나 손을 내젓지는 않았다.
그 허락 같지 않은 허락을 보고서야 진소백은 천천히 다가갔다. 약낭을 먼저 내려놓고, 두 손을 비워 보인 뒤 무릎을 꿇었다. 하 노인의 숨은 얕고 빨랐다. 기침이 목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 오래 썩어 있던 마른 나무가 한꺼번에 갈라지는 소리였다.
진소백은 소매를 걷었다. 노인의 손목을 잡을 때 힘을 거의 주지 않았다. 마른 손목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맥은 가볍게 뜨다가 갑자기 깊이 꺼졌다. 놀람으로 기가 흩어지고, 오래된 한증과 담이 가슴에 엉킨 모양이었다. 어제의 소란, 밤중의 침입, 달아나지 못한 공포가 한꺼번에 노인의 허파를 붙들고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쉬어 보십시오.”
“안 된다. 안 돼…… 말하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숨만 보겠습니다.”
진소백은 그의 등에 손을 대지 않고 먼저 손바닥을 가까이 댔다. 하 노인이 움츠러드는지 보려는 것이었다. 노인은 몸을 굳혔지만 밀쳐 내지는 않았다. 진소백은 손끝으로 등뼈 옆의 굳은 곳을 짚었다. 노인의 살갗 아래로 묵은 상처가 만져졌다. 칼자국인지 몽둥이 자국인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래전에 깊게 맞은 몸은, 시간이 지났어도 겁을 기억한다는 것을 진소백은 배워 알고 있었다.
고진명은 언젠가 말했다. 아픈 몸은 거짓말을 늦게 한다고. 입은 숨겨도 맥은 숨기지 못하고, 맥이 숨겨도 오래된 상처는 제 사연을 움켜쥔다고.
진소백은 그 말이 싫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벗기는 말 같아서였다. 그러나 하 노인의 등을 짚는 지금은, 그 말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조심하라는 뜻이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약낭을 열었다. 천패모 가루를 조금 덜고, 감초를 부수어 사발에 넣었다. 부엌으로 가 물을 찾으려는데, 하 노인이 허겁지겁 그의 소매를 잡았다.
“거기…… 가지 마라.”
진소백은 멈췄다.
부엌 문턱 너머는 더 어질러져 있었다. 쌀독의 뚜껑은 열려 있었지만 쌀은 그대로였다. 장작더미가 흩어졌고, 벽 아래 흙바닥에는 작은 구멍을 파헤친 자국이 있었다. 손가락이나 칼끝으로 판 듯했다.
진소백은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물만 가져오겠습니다. 다른 것은 보지 않겠습니다.”
하 노인의 손아귀가 조금씩 풀렸다. 그 손은 힘이 없는데도 오래 버틴 사람처럼 단단했다.
물을 끓이는 동안 진소백은 부엌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있었다. 누군가 매우 급하게, 그러나 찾을 곳을 알고 뒤진 흔적. 쌀독 속, 장작 밑, 아궁이 옆 흙, 문설주 틈. 돈 꾸러미와 비녀를 지나쳐 그런 곳만 파헤친 손.
종이.
그 단어가 진소백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제 밤, 뇌곡의 피 묻은 얼굴과 하 노인을 노리던 진짜 표적. 그리고 약재를 사던 처녀가 낮은 목소리로 했던 말.
하 노인에게 빈손으로 가지 마라. 스승 이름 말고.
진소백은 사발을 들고 돌아왔다. 약물이 뜨거워 김이 올랐다. 그는 입으로 불어 식힌 뒤 하 노인의 손에 쥐여 주려 했으나, 노인의 손이 너무 떨려 받을 수 없었다. 진소백은 사발을 들고 조금씩 입가에 대 주었다.
“한 번에 삼키지 마십시오. 혀에 적시듯이요.”
하 노인은 처음엔 고개를 돌렸다. 약 냄새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남에게 받아먹는 일이 더 무서운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기침이 다시 올라오자 그는 사발 가장자리에 입술을 댔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뜨거운 물이 목을 지나가는 동안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진소백은 그제야 등 뒤 굳은 혈을 눌렀다. 세게 누르면 몸이 놀랄 터였다. 약한 압으로 시작해 숨이 빠지는 박자에 맞추었다. 하 노인의 기침은 한동안 더 거칠었지만, 곧 마른 쇳소리에서 젖은 가래 소리로 바뀌었다. 진소백은 천 조각을 내밀었다. 노인은 누런 가래를 뱉고 나서 한참 눈을 감았다.
그 얼굴에 잠시 사람이 돌아왔다.
“어제보다 낫습니다.”
진소백이 말했다.
“겁을 먹으면 숨이 위로만 몰립니다. 그러면 가슴에 있던 담이 더 붙습니다. 약은 자주 드셔야 하고, 오늘은 찬 강바람을 피하셔야 합니다.”
하 노인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강바람 피하는 사공이 어디 있나.”
“오늘 하루만 피하십시오.”
“하루 피하면…… 내일 죽는 것이냐.”
“내일도 살 생각을 하셔야지요.”
말하고 나서 진소백은 스스로 어색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몰랐다. 그는 죽은 스승의 이름 하나 제대로 묻지 못해 여기까지 왔고, 칼도 없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몇 번이나 밀렸다. 살 생각을 하라는 말은 남에게 하기엔 가벼웠고, 자신에게 하기엔 무거웠다.
하 노인은 눈을 조금 열었다. 진소백을 보았다. 아까와 달리, 도망칠 길을 찾는 눈만은 아니었다.
“너는…… 왜 자꾸 오느냐.”
진소백은 약낭 끈을 묶었다.
“아프시니까요.”
“약방 놈들은 돈을 받아야 온다.”
“저도 약방에서 일합니다.”
“너는 돈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받겠습니다. 어르신이 기침을 덜 하면요.”
하 노인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으려다 실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얼굴이 굳었다. 방 안의 어질러진 살림을 본 탓인지, 그의 숨이 다시 가빠졌다.
“그놈들이…… 또 온다.”
진소백은 사발을 내려놓았다.
“누가 왔습니까.”
하 노인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진소백은 바로 말을 고쳤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제가 알아야 피할 수 있습니다. 돈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값나가는 것도 그대로입니다. 누가 무엇을 찾은 겁니까.”
하 노인은 입을 닫았다. 닫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누군가 틀어막는 것 같았다. 목울대가 몇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말하면 죽는다. 그는 그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어제도, 그제도, 진소백이 처음 그를 찾았던 날도. 그것은 협박을 들은 사람의 말이기도 했고, 오래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에게 박아 넣은 못 같은 말이기도 했다.
진소백은 더 묻지 않았다.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먼저 깨진 그릇 조각을 한곳에 모았다. 메밀껍질을 쓸어 담고, 이부자리를 털었다. 궤짝에서 꺼내진 옷가지를 접었다. 하 노인은 그가 손대는 물건마다 눈으로 좇았다. 진소백은 매번 물었다.
“이건 여기 두면 됩니까.”
하 노인은 대개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때는 손가락으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벽 밑의 작은 틈을 진소백이 우연히 가리게 되었을 때는 숨을 멈추었다. 진소백은 그곳을 보지 않은 척 몸을 돌렸다.
그 작은 배려 하나가 무슨 문을 열었는지, 한참 뒤 하 노인이 낮게 말했다.
“없다.”
진소백은 멈췄다.
“무엇이요.”
“찾던 것.”
그것으로도 충분히 큰 말이었다. 진소백은 몸을 돌리지 않고 기다렸다. 먼지가 뜬 햇살이 방 안에 비스듬히 들어와 하 노인의 발등에 걸렸다.
“없다. 여긴.”
진소백은 천천히 대답했다.
“옮기셨습니까.”
하 노인은 곧장 떨기 시작했다. 질문이 너무 가까웠다는 것을 진소백은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묻지 않겠습니다.”
노인은 한동안 숨만 쉬었다. 진소백은 접던 옷을 마저 접었다. 옷은 오래 빨아 얇았고, 소매 끝은 닳아 있었다. 그 안쪽에 바늘땀이 삐뚤게 박힌 자리가 있었다. 선화가 해 준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어제 어린 뱃사공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노인의 팔을 붙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문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하 할아버지!”
선화였다. 문이 활짝 열리며 작은 몸이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방 안 꼴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었다. 아마 배를 묶고 바로 달려온 듯했다.
“누가…… 누가 이랬어요?”
하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오지 말라니까.”
“내가 안 오면 누가 와요!”
선화는 울지 않으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금방 울 것 같았다. 그녀는 진소백을 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의원 오라버니, 할아버지 괜찮아요?”
“지금은 숨이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놀라게 하면 안 됩니다.”
“누가 했는지 봤어요?”
진소백은 하 노인을 보았다. 노인의 손가락이 이불 끝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직 모릅니다.”
선화는 방 안을 둘러보다 동전 꾸러미를 보았다. 아이의 눈에도 이상했는지, 그녀가 작게 말했다.
“돈은 그대로네.”
그 한마디에 하 노인의 몸이 다시 굳었다. 진소백은 선화에게 손짓했다. 조금 낮게, 천천히.
“선화야, 밖에서 물 좀 더 데워 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 깨진 그릇 조각 버릴 바구니도.”
선화는 무언가 더 묻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하 노인의 창백한 입술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면서 그녀는 문지방의 흙을 밟지 않으려 발끝을 들었다. 그 작은 조심성 때문에 진소백은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선화가 나간 뒤 하 노인이 말했다.
“아이에게 말하지 마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예.”
“그 애는…… 강만 건너면 된다.”
하 노인의 목소리는 쉰 갈대처럼 가늘었다. 그러나 그 안에 붙잡힌 것은 분명했다.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진소백은 그것을 함부로 이름 붙이지 않았다.
노인은 기침을 한 번 더 했다. 진소백은 사발을 다시 들어 약물을 조금 먹였다. 이번에는 노인이 거부하지 않았다.
해가 조금 더 올라오자 방 안의 어둠이 물러났다. 밝아질수록 뒤진 흔적은 더 선명했다. 문설주 안쪽 긁힌 자국, 벽지 뒤를 더듬은 손때, 아궁이 재를 뒤엎은 발자국. 누군가는 밤에 와서 하 노인이 숨겨 둔 것을 찾았다. 찾지 못했다. 아니, 찾지 못했기에 방이 이렇게 되었다.
진소백은 문득 등 뒤가 서늘했다.
하 노인이 이미 옮겼다면, 그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옮기기 전의 자리를 아는 자가 왔을까, 아니면 그저 하 노인의 집을 무작정 뒤진 것일까. 어제의 습격과 오늘의 침입은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그 줄 끝에는 종이 한 장이 매달려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문밖에 그림자가 스쳤다.
진소백은 고개를 들었다. 선화가 돌아오기엔 발소리가 달랐다. 가볍고 조용했다. 그는 일어나 문가로 갔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낮은 담 너머로 골목이 보였고, 골목 끝에서 파란 치맛자락 같은 것이 잠깐 흔들렸다가 사라졌다.
진소백은 망설이다 밖으로 나갔다.
담장 밑, 물항아리 옆에 작은 약초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깨끗한 삼베 조각으로 묶여 있었고, 매듭 사이에 짧은 종이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종이에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폐를 눌러 잠재우지 말고 담을 먼저 풀 것. 밤에는 혼자 두지 말 것.’
글씨는 단정했으나 끝이 날카로웠다. 약재 처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여자. 세 하수인을 숨 쉬듯 제압하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약재 값을 물었던 여자. 그녀는 하 노인의 기침이 무엇인지도, 이 집을 누가 다시 찾을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꾸러미 안에는 진피와 반하, 소량의 행인이 들어 있었다. 모두 지금 하 노인에게 쓸 수 있는 약재였다. 너무 정확했다. 우연히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었다.
진소백은 골목 끝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쪽지를 접어 소매 안에 넣지 않고, 약낭 옆에 그대로 두었다. 감출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하 노인이 그것을 보면 더 두려워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 노인은 그를 보고 있었다.
“누구냐.”
“약재를 두고 갔습니다.”
“버려라.”
말은 빨랐다. 눈은 더 빨랐다. 하 노인은 꾸러미를 보자마자 알아본 것처럼 움찔했다. 진소백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버리라니까.”
“독은 아닙니다. 약재는 맞습니다.”
“약이면 다 약이냐.”
진소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약도 누가, 언제, 왜 주느냐에 따라 칼보다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하 노인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시 숨이 거칠어졌다. 진소백은 약재 꾸러미를 문가 멀리 내려놓고, 노인 곁으로 돌아왔다.
“쓰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가져온 것만 쓰겠습니다.”
그제야 하 노인의 호흡이 조금 내려왔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문가에 붙어 있었다. 저 약재가 사람이 되어 다시 들어올까 두려운 것처럼.
선화가 물과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진소백은 그녀에게 하 노인의 등을 따뜻하게 덮을 천을 부탁했다. 선화는 말없이 움직였다. 어린 손이지만 집안일에 익숙했다. 그녀는 흩어진 장작을 모으고, 아궁이에 불씨를 살렸다. 그 사이 하 노인은 몇 번이나 그녀를 쫓아내려 했지만, 선화는 못 들은 척했다.
낮 무렵, 하 노인은 조금 잠이 들었다. 잠이라고 하기엔 얕았다. 작은 소리에도 눈꺼풀이 떨렸다. 진소백은 문가에 앉아 약탕기 불을 보았다. 선화는 마당에서 찢어진 벽지 조각을 쓸고 있었다.
그때 하 노인이 아주 낮게 불렀다.
“진…… 의원.”
진소백은 몸을 가까이 했다.
“예, 하 어르신.”
“네 스승.”
진소백의 손이 멈췄다. 고진명의 이름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약재 처녀의 말 때문이었다. 하 노인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 스승 이름 말고. 그래서 그는 묻지 않았다. 스승의 흔적을 찾으러 왔으면서도, 가장 묻고 싶은 것을 눌러 두었다.
하 노인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이름은…… 말하지 마라.”
진소백은 숨을 삼켰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산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진소백은 등골을 타고 식은 기운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어르신은 제 스승을 아십니까.”
하 노인의 입술이 마른 채 움직였다. 한참 동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진소백은 더 묻지 않았다. 약탕기에서 물 끓는 소리만 났다.
“오래전.”
노인이 말했다.
“오래전 이 물길을 지나간 사람이 있었다.”
진소백은 움직이지 않았다.
“비가 많이 왔다. 강이 미쳐 있었다. 배를 띄우면 죽는 날이었지. 그런데도 건너야 한다고 했다. 꼭 건너야 한다고.”
고진명일까. 진소백은 그 이름을 떠올렸으나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스승은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발소리를 지운다고 했었다. 진소백은 그 말이 왜 지금 생각나는지 알 수 없었다.
하 노인의 목이 다시 잠겼다. 진소백은 물을 적신 천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 사람이…… 무언가를 맡겼습니까.”
하 노인의 눈꺼풀이 떨렸다. 대답이 오기까지 오래 걸렸다.
“맡겼다기보다…… 버리고 갔다.”
“버리고 갔다고요?”
“사람이 못 들고 가는 것도 있다.”
진소백은 그 말의 뜻을 붙잡으려 했다. 물건일까. 죄일까. 이름일까. 하 노인의 호흡이 다시 빨라지자 그는 생각을 멈췄다.
“그만 말씀하십시오.”
“나는 모른다.”
“예.”
“정말 모른다. 읽지도 못했다.”
읽지도 못했다.
진소백은 그 말에서 종이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노인이 말하지 않으려 해도, 아픈 몸과 흩어진 숨 사이로 한 조각이 흘러나왔다. 읽지 못했다면 글이 있는 물건이었다. 돈이 아니고, 비녀가 아니고, 약재도 아닌 것.
종이.
하 노인은 눈을 떴다. 눈동자가 흐렸지만, 그 안에는 애원 같은 것이 있었다.
“그걸 찾는 자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진소백은 어제 뇌곡이 맞던 장면을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은 제 손에 묻은 피를 보면서도 악인을 벌한다고 믿었다. 누군가 그렇게 몰아갔다. 애먼 자를 살인귀로 만들고, 그 소란 속에서 하 노인을 노렸다. 그리고 밤에는 이 방을 뒤졌다.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진소백은 말했다.
“하지만 어르신이 가지고 계시면 위험합니다.”
하 노인은 갑자기 진소백의 손목을 잡았다. 아까와 달리 힘이 들어 있었다. 마른 손가락이 뼈를 파고들었다.
“가지고 있지 않다.”
“예.”
“여기 없다.”
“알겠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 아이에게도. 약방 사람에게도. 객잔에도.”
허봉의 얼굴이 스쳤다. 정든 이웃처럼 굴던 사내. 아픈 아이 허만복의 얇은 손목. 진소백은 그 집에서 본 기침과 열을 떠올렸다. 의심은 쉽게 사람을 더럽혔다. 어제 마을이 뇌곡에게 그랬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거기서 멈추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 노인의 손이 풀렸다. 그는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짧은 말 몇 마디가 노인의 남은 힘을 모두 가져간 듯했다.
오후가 되자 선화가 죽을 끓여 왔다. 하 노인은 두 숟가락밖에 먹지 못했다. 진소백은 억지로 더 먹이지 않았다. 대신 약을 조금 더 묽게 달여 시간마다 입에 적셨다. 기침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지만, 숨이 끊어질 듯 튀는 일은 줄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진소백은 방을 거의 정리했다. 찢어진 벽지는 그대로 두었다. 누군가 뒤진 자리를 모두 없애 버리면, 무엇을 찾았는지 기억할 길도 사라질 것 같았다. 대신 그는 마음속으로 위치를 새겼다. 쌀독. 아궁이. 문설주. 벽 틈. 이부자리 속. 장작 밑.
찾는 자는 하 노인의 몸 주변, 하 노인이 매일 손대는 곳을 뒤졌다. 하 노인을 잘 아는 자이거나, 그런 자에게 들은 자였다.
문밖에서 선화가 낮게 물었다.
“오라버니, 할아버지 죽지 않겠죠?”
진소백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쉬운 말은 때로 거짓과 비슷했다. 그는 선화 옆에 서서 강 쪽을 보았다. 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렀다.
“오늘 밤을 잘 넘기게 해야 한다.”
“내가 있을게요.”
“혼자 있으면 안 된다.”
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무서워도 있을 거예요.”
진소백은 그녀에게 작은 약봉지를 건넸다.
“기침이 심해지면 이것을 뜨거운 물에 조금 풀어 드려라. 숨이 막히면 등을 두드리지 말고, 상체를 세워 기대게 해. 그리고 누가 오면 문부터 열지 마라.”
“누가 또 와요?”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화는 그의 침묵에서 답을 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가 돌아서려 할 때, 하 노인이 안쪽에서 말했다.
“진 의원.”
진소백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이부자리 위에 반쯤 기대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아침의 그 무너진 모습은 아니었다.
“빈손으로 오지 않았구나.”
진소백은 잠시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다 약낭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른 웃음을 조금 지었다.
“약밖에 없습니다.”
“약이면 됐다.”
하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진소백은 이상하게 가슴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뢰라는 것은 큰 문이 열리는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겁에 질린 노인이 남의 손에서 약 한 모금을 받아 삼키는 일, 묻지 않겠다는 말을 믿고 한 조각을 내주는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한 조각은 더 큰 어둠을 불렀다.
오래전 이 물길을 지나간 사람. 무언가를 버리고 간 사람. 읽지도 못한 종이. 그것을 찾는 자들. 돈은 그대로 두고 방을 뒤집은 손.
진소백은 문밖으로 나와 약재 꾸러미가 놓였던 자리를 보았다. 여인의 글씨가 아직 눈앞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하 노인의 병을 알고 있었다. 침입 뒤에 또 무슨 일이 올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아마, 그 종이가 무엇인지도.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강바람이 불었다. 저녁 물빛은 검푸르게 가라앉았고, 마을의 지붕들은 하나씩 어둠 속에 잠겼다. 진소백은 빈 허리를 느꼈다. 칼도 없고, 답도 없었다. 손안에는 약 냄새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 애먼 자를 살인귀로 몰고, 늙은 사공의 방을 갈가리 뒤집었다.
종이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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